「SPACE(공간)」 2025년 1월호 (통권 686호)
김광수 스튜디오 케이웍스 대표 × 이종건 作家
투명사회-불투명성
김광수(김): 본래 공간과 장소에 맞도록 조각품 커미션을 계획하고 진행됐던 조각갤러리였으나 준공 후 시장이 바뀌면서 커미션을 진행하지 못하게 돼 발주처에서 아트갤러리로 명명하게 됐다. 작업은 원주시 단구동의 커다란 아파트 단지들로 둘러싸여 있는 비교적 작지 않은 근린공원 내에 위치한다. 설계를 시작할 무렵인 2020년 5월, 아침저녁으로 이 공원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돌고 도는 산책자들을 많이 봤다. 그러면서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 파동이 시작됐던 때였기에 사람들은 집 안에 고립된 채 있었지만, 고립과는 반대로 초연결사회 및 투명사회, 감시사회가 기하급수적으로 가속화돼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코로나 방역 조치가 끝난 후에는 해외를 나가 보아도 구글 지도 서비스 등으로 별 저항감 없이 매끄럽게 동선이 이어진다거나 예기치 않았던 발견이나 경험을 좀처럼 하기 힘들었다. 진정으로 외부가 닫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외부에서 미지의 감각을 느끼고 경험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더 내부에 천착하며 그 안에서 외부성을 발견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또한 이 작업은 알도 반 아이크의 조각 파빌리온(1966)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이종건(이): 원주 아트갤러리(조각갤러리)(2022)가 낯선 것을 다 몰아낸 사회적 상황에서 기인했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 조각 파빌리온을 불러온 물리적 맥락은 무엇인가?
김: 100평밖에 안 되는 규모와 조각갤러리라는 기능이 알도 반 아이크의 조각 파빌리온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던 근대 시기의 건축가로, 다른 건축가들과 특히 투명성의 측면에서 행보가 달랐다고 생각한다.
이: 알도 반 아이크는 흔히 말하는 모더니스트와는 다른 디자인을 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알도 반 아이크뿐 아니라 건축을 공부하면서 내장된 수많은 건축 메모리들이 있을 것이다. 규모가 작고, 기능이 조각 전시라는 점으로 인해 알도 반 아이크가 불려 나온 것인가?
김: 그렇다. 또한 좋아하는 과거 건축가와의 상상 속 대화는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이: 알도 반 아이크가 1960년대에 했던 조각 파빌리온은 당대의 맥락에서 나왔고, 지금 우리의 맥락과는 다르다. 사회적 맥락은 물론, 물리적 맥락도 다르다. 맥락이 다른 문제는 어떻게 다뤘나?
김: 조각 파빌리온은 평지에 자립벽의 레이어들로 구성돼 있다. 반면, 원주 아트갤러리는 산자락에 있고, 산은 다른 나라의 도시들에 비해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점한다. 또한 주민들이 이 산을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뱅글뱅글 도는 모습을 뇌리에 두었다. 산세와 주민들의 동선이 부합되며 공원 전체와 관계하는 설계를 하고자 한 것이다.
이: 알도 반 아이크 건축의 어떤 건축적인 형식, 공간 등의 차원을 재해석할 대상으로 삼았는지 질문한 것이다.
김: 알코브가 가진 불투명성의 감각과 미로 혹은 미지의 감각이다. 나 또한 이 작업에서 공간의 투명성이 아닌 불투명성을 주제로 삼았지만, 알도 반 아이크와는 달리 여러 개의 벽보다는 하나의 벽 혹은 선이 지붕과 일체돼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두 갈래의 길들이 생기고 알코브들이 형성돼 공간에 불투명성과 두께감을 부여하는, 그러면서 문득문득 조각이 발견되는 구성을 의도했다. 또한 알도 반 아이크의 건물은 미로지만 측면에서 보면 출구가 바로 보인다. 나는 어디인지 인지가 안 되는, 산세와 부합하는, 여러 개의 벽이 아니라 하나의 벽으로 구성된, 벽이라는 감각보다는 출구를 알기 힘든 흐름의 ‘동세(動勢)’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 알도 반 아이크와 김광수 작업의 공통점이라면 공간이 굉장히 내밀하다는 것이다. 혼자서 대면하는 공간이지 여러 명이 보는 공간은 아니다. 공간 전체를 시야로 지배할 수 있는 거리로써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무척 육감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보는, 거리의 감각 또는 공간의 스케일이 아닌가 싶다. 투명성-불투명성보다 단속성-연속성과 연관지어 말하자면,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아니라 간섭과 분기를 일으키면서 공간이 이형적으로 복제된다. 콜린 로우는 공간의 미학 중 이쪽과 저쪽의 방향성이 애매하거나 갈 수도 멈출 수도 있는 공간들을 언급한 바 있는데, 원주 아트갤러리도 길인 듯 하지만 멈춰도 될 것 같은 애매성을 갖췄다. 이것을 보면서, 코로나의 상황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는 홀로된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소셜 스페이스-오브제 건축
이: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을 추상이 아닌, 구체적이고 신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에 더해 주체가 경험한 것을 타인과 즉각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휴식 공간이 매우 중요하다. 루이스 칸의 킴벨 아트뮤지엄(1972)에서 중앙 큰 베이의 휴식 공간도 몸에서 움칠거리거나 감질거린 직접적인 경험이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와 즉각적으로 교환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의 소셜 스페이스가 궁금하다.
김: 원주 아트갤러리의 홀은 본래 카페로 계획됐다.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와서 담소를 나눌 뿐만 아니라 작품 관람 후 쉬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이: 그 공간이 미술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소셜 스페이스에서 언뜻언뜻 작품들을 보고, 작품을 본 후 다시 돌아와 개인적 체험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차이를 파악함으로써, 홀로 동떨어진 개별적 존재가 사회적 존재로 바뀌고 예술과 삶이 결부될 지반을 얻을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혼자 비디오방에 가서 비디오 보고 끝난 것처럼 특이한 개별적 경험은 휘발된다. 그런데 지금 이 카페 공간은 이상하게 쓰이는 것 같다.
김: 현재로는 그렇다. 원주 아트갤러리의 주변 상가에서 갤러리에 카페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다고 들었고, 이후 전임 시장의 임기가 끝났는데 어느 날 가 보니 카페시설이 철거돼 있었다. 그러면서 전시 공간으로 변경했는데 사실 전시 공간으로 쓰기도 애매한 공간이다. 또한 본래는 공간의 알코브에 부응하는 조각품을 커미션으로 진행하고, 근린공원 전체가 조각공원으로 펼쳐지기를 의도했다. 이런 실행 계획들이 변경돼 아쉽다. 소셜 스페이스를 나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짚고 넘어갈 부분도 있다. 여러 현대미술관이 들어서는 방식들을 살펴보면, 건축이나 전시 디자인이 콘텐츠를 압도하며 작품과 공간이 괴리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콘텐츠를 실질적으로 접하기 전에 이미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되려고 하는 경향이 지속됐고,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끼기도 하기에 건축 표현과 전시 공간의 중립성이라는 구도보다는 건축과 작품이 일체화되고 고유해지는 방식을 더욱 고민했다. 또한 현대미술관에는 사실 쇼핑몰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소셜 스페이스들이 많이 생기지 않았나?
이: 지나치게 많이 생겼다. 1990년대부터 미술관에 관해 논할 때 상업 공간을 미술관에까지 끌어들여야 운영 유지가 가능한 상황이 되다 보니, 거의 모든 유명한 갤러리에 근사한 레스토랑과 카페가 침투했다. 갤러리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데이트를 하는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주객전도의 형국인 셈이다.
김: 히토 슈타이얼도 하룬 파로키의 작품을 언급하며 옛날 뤼미에르 공장에서 나온 노동자들이 미술관이라는 공장으로 주말이면 다시 돌아간다고 말했다. 예술이 상품화되고, 미술관이 상업적 공간으로 변모한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이: 그러한 논의가 나온 때는 절묘하게도 건축가, 예술가 그리고 적지 않은 인문학자들이 ‘미술관이야말로 21세기의 대성당’이라 인식한 시점이다. 미술관을, 모든 공간들이 다 세속화된 데 반해 가장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긴 때였다. 희한하게도 미술관이 문화의 정점으로 여겨졌던 그때, 본격적으로 세속화되기 시작했다.
김: 그러면서 예술 서사의 종말론도 나왔다.
이: 그러다 보니, ‘건축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돼야 한다’는 의견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그로부터 미술관의 맥락 혹은 배경으로 물러난 건축이 전면에 나서서 스스로 작품이 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1997) 등이 기폭제가 돼 전 세계의 도시에서 건축이 예술이 되려고 한 움직임들이 많이 생겼는데, 이는 어마어마한 자본을 필요로 하며 예술가들이 건물에 점령된 듯한 형국을 만든다. 건축이 예술가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도 갈등을 한다. 100평밖에 안 되는 공간에 알코브를 만들고, 작가들에게 이에 맞는 작업을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일방향적이고 강압적이다. 한편으로는 완전히 뉴트럴한 공간에 작품을 설치하는 시기가 너무 오래 지속됐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보니 작품 자체도 투명화된 것 같다. 미술관을 가도 작품이 나에게 침입하거나, 내가 작품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상호 간의 힘이 없어졌다. 현대미술관을 가면 관람객이 상당한 노력으로 신중을 기해 작품을 보지 않는 이상 스치듯 지나가게 되고, 사진 좀 찍은 후, 훌러덩 나오게 된다. 조각 작품은 반드시 360도로 감상해야 한다는 등의 관념이 있는데 이것에도 의문이 들면서, 오히려 중립성보다는 명확한 공간과 작품이 함께하며 고유성을 담보하는 작업을 하고자 했다.
이: 만프레도 타푸리도 그랬지만, 지난 세기에는 한동안 건축이 오브제가 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다. 특히 우리 건축가들은 오브제 건축을 퇴폐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었다. 건축은 다만 추상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도그마를 형성했다.
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언젠가부터 튀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이 심화됐다. 그런데 튀지 않게 한다는 의미가 결국 모더니즘 스타일로 귀결되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에도 공감하기는 힘든 입장이었다.
인공 vs. 자연/동세
이: 원주 아트갤러리도 튀지 않는 것 같다. 지형에 순응하고 차분하다. 프로그램과 의도 등 여러 가지 대응에 따른 작업으로 보인다.
김: 대응이 곧 형상이 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게 튀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나 또한 들었다. 안 튀려고 한 것도 아니고 튀려고 한 것도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 오래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동양 특히 한국에서는 ‘건물이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는 논리가 건축 사회를 지배했다. 인공과 자연의 관계에서 순응 혹은 지배의 태도에 관해서는 고민한 바가 없나?
김: 우선 인공과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방식에 의문이 많았다. 인공도 자연현상의 일부라 생각했고, 자연도 결국 도구적 이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공화된 자연 아닌가라는 의문 때문이다.
이: 건축 기하학의 관점에서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라는 식으로 인공과 자연을 구분하기도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를 포함한 철학 일반에서는 인간은 자연에서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만 인간으로 출현하고, 따라서 오직 그로써 문명 혹은 문화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자연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 또한 자연의 일부인 모순적 이중성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다.
김: 나는 일반적으로 인공과 자연을 구분해 사고하는 방식을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인공과 자연을 구분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두지 않나. 그리고 인공에 자연을 어떻게 해서든 가져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5.16 광장이 여의도공원이 되고,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이 생태공원이 되는 식이다. 이상과 현실을 겹눈으로 보는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인공/자연 이분법은 오히려 현실을 은폐하는 것 같다.
이: 인공화된 자연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자연, 즉 절대적 자연도 있다. 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도시에서 살아가니 도시도 제2의 자연인 셈이다. 인공과 자연을 엄격히 구분하기는 힘들겠지만 논의의 편리를 위해 이분법에 따르자면, 원주 아트갤러리는 자연에 순응하고 있다고 본다. 대지에 눈썹처럼 붙어 있다. 능선과 흐름을 따르고 있다.
김: 산과 산세, 주민들의 산책 흐름을 보면서 이 작업에 ‘동세’가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동세를 순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순응은 방해, 곧 역행을 안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외부 형상과 내부 공간 간의 반전은 일어난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도 저도 아닐 뻔했다.
김: 사실 나는 약간의 불편함까지 의도했다. 출입구도 ‘여기가 정문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어디서든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면 동선이 혼동되도록.
이: 나 또한 원주 아트갤러리의 건축적 가치는 바로 그러한 모호성에 있다고 본다. 흐름을 흐트러뜨리고, 입구를 교란시키고, 내외부는 단절되거나 구획되지 않고 모호하다. 공간의 높낮이도, 자연의 빛과 인공의 빛도 모호하다.
김: 응축과 펼쳐짐이라는 감각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100평쯤 되는 공간인데 평면도를 보면 한 500평은 돼야 할 것 같다고 느낄 것이다. 500평을 압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공간이 주는 밀착감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밀착의 감각을 갖게 하려면 공간을 압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밖으로 나왔을 때 산세와 함께 펼쳐지는 느낌이 있기를 바랐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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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케이웍스+ 건축사사무소 커튼홀(김광수)
권혁태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1708 외 1필지(원주여성가족공원)
문화 및 집회시설, 근린생활시설
54,246㎡
326.17㎡
324.89㎡
지상 1층
5대
3.8m
0.6%
0.6%
철근콘크리트조
노출콘크리트, 벽돌
노출콘크리트, 페인트
(주)밀레니엄 구조
(주)주성이엔지
기술사사무소 우림전기
무한건설주식회사
2020. 5. ~ 11.
2021. 5. ~ 2022. 10.
15.2억 원
원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