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2년 5월호 (통권 654호) 게재
30여 년 역사가 있는 철제 사무용품 제조사 신기산업은 현재 부산 영도에서 상점 및 식음료 공간 다섯 군데를 운영 중이다. 이 공간들은 기존 건물을 개인이 재생한 곳으로, 건축적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오신욱(라움건축사사무소 대표)은 신기산업의 새로운 카페를 기획하면서 이 기존 공간들에서 건축 요소를 발견하고 녹여냄으로써 브랜드의 연속성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와 나눈 이야기에서 신기해로가 지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보자.
인터뷰 오신욱 라움건축사사무소 대표 × 한가람 기자
한가람(한): 작년 겨울, 신기산업이 카페 신기해로를 열었다. 신기산업과 이 기업이 운영하는 공간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오신욱(오): 부산에 카페 문화가 안착하고, 체인점이 아닌 독립 카페들이 알려지게 된 건 4~5년 전부터다. 특히 기장은 웨이브온, 로쏘와 같은 카페가 들어서며 카페 건축의 경연장이 되고 있다. 부산 지역 중 예상치 않게 급부상한 곳이 영도다. 영도는 ‘한번 들어가서 살기 시작하면 삼신할매가 심술을 부려 쉽게 떠날 수 없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기가 센 곳인데, 2018년 신기산업이 신기카페를 열자 이를 기점으로 여러 카페가 들어섰다.
신기산업은 금속 방울을 만들던 공장에서 출발한 철제 사무용품 제조회사다. 기업을 이어받은 젊은 형제는 제조업 위기를 극복하고자 새로운 분야를 모색했다. 그 당시 카페가 급부상하기도 했고, 형제가 건축과 도시 재생에 관심이 생긴 시점이라 사옥 일부를 카페로 바꾸게 되었다. 영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하얀 컨테이너를 쌓고 하부를 비워낸 건물은 SNS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현재 신기산업은 이곳을 거점으로 주변 건물을 개조하고 재생해 또 다른 카페와 식당, 문구점 등을 운영하는 중이다. 마치 ‘신기타운’ 같은 형태다.
한: 신기해로는 신기산업이 처음으로 건축가와 함께한 작업이자, 처음으로 부산이 아닌 거제도에 마련한 공간이다.
오: 어느 날 신기산업 대표가 거제도 다대리로 드라이브를 갔다가 한 횟집이 철거되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사람들이 바다를 보며 쉬는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그에게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카페를 지을 땅을 구입했는데 대지가 매우 비정형이고, 내가 작업한 카페들을 보고 함께 좋은 공간을 꾸리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신기산업은 건축가 없이 인테리어 영역에서만 공간을 다뤄왔고, 거제도의 새 카페도 영도처럼 공간을 재생하는 분위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큰 도시에서 원도심을 재생하는 건 괜찮아도, 거제도 같은 작은 섬에서 같은 방식을 취하는 건 맞지 않다고 여겼다. 이 땅에 맞는 공간을 새롭게, 제대로 조성해야 한다고 클라이언트를 설득했고, 그가 이를 받아들이며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한: 건물은 거제도 대표 관광지인 바람의 언덕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위치한다. 대지에 대한 해석이 건물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설명해 달라.
오: 매스는 주변 바다, 인근 산세, 바람의 방향을 찾아내고, 그것들과 건축이 어떻게 조우하면 좋을지를 고려했다. 3차원적으로 중첩된 매스는 안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을 계산해 비우고 채워진다. 그다음 계단과 동선을 이용해 매스를 연결하며 2차원 평면을 완성했다. 2차원에서 3차원 과정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설계 방식이지만, 3차원 고민을 먼저 한 후에 2차원으로 마무리되는 방법을 취했다.
대지를 해석할 때, 건축주가 작명해온 신기해로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신기해로는 신기산업이 영도에서 거제도로 매장을 열며 바닷길(해로)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다. 영도에서 이곳으로 올 때의 바닷길을 상상하며 카페 위치와 진입 방향을 설정했다. 이외에도 밀물과 썰물, 바람이 가진 힘을 보여주고자 옥상에 수공간과 파빌리온을 조성했다. 바람의 언덕 이미지도 건물 곳곳에 응용했다. 건축가로서 언덕을 재연출하는 것이 촌스러울 수 있으나, 일반인이 이용하는 시설임을 고려해 쉬운 암시를 주고 싶었다.
한: 신기산업의 브랜드, 그리고 이들이 운영하는 공간은 신기해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오: 사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하기 전까지 신기산업을 잘 몰랐고, 신기산업도 자신들의 기존 공간에 어떤 정체성이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나는 우선 신기산업이 거제도에 카페를 짓는다면 어때야 하는가에 주목했고, 앞으로 이들이 가져가야 할 공간 정체성을 역으로 제안했다. 이를 위해 신기산업의 다양한 공간을 둘러보며 각 공간이 지닌 특징을 분석했다. 이때 건축가의 시선이 아닌 일반인의 시선으로 신기산업의 건축적 이미지를 발견하고자 했다. 신기카페의 쌓여 있는 컨테이너, 바다를 향해 열린 큰 오프닝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한 이미지를, 현재 대지에서 컨테이너 형상과 유사한 입방체를 쌓고 비틀고, 또 1층에 필로티를 만들어 매스를 들띄우는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신기산업이 운영하는 또 다른 카페 신기숲은 뒤쪽 숲으로 큰 창을 내서 선택적으로 풍경을 포착한다. 나는 이 방식에 집중했고, 신기해로 역시 밖을 바라보는 내부가 더 가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기해로에서는 각도에 따라 외부를 보는 장면을 달리해 자연을 선택적으로 실내에 끌어들인다. 또한 바다를 보는 데 눈이 부시지 않도록 방향을 조절했다.
마지막으로 신기산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최초 이미지를 찾았다. 금속 방울을 제작하던 신기산업은 방울을 만드는 기계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 또한 브랜드 가치라 생각해 기계 전시실을 1층에 별도 볼륨으로 마련했다. 옥상에 알루미늄을 사용해 파빌리온을 조성한 것도 이와 연결된다. 루버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 마치 방울 소리가 나는 듯한데, 이는 자연을 여러 감각으로 체험하게 하는 동시에 신기산업의 특색을 보여준다.
한: 건축가가 기획까지 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얻은 점이 있을 것 같다.
오: 어떤 공간의 유형과 공간을 브랜드화한다는 게 쉽지 않다. 추상적일지라도 혹은 아주 거칠지라도, 신기산업의 특징을 건축에 담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공간 아이덴티티는 브랜드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마케팅 요소가 되어 사람들이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를 선사한다.
신기산업은 이 마을을 영도처럼 ‘제2의 신기타운’으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다. 클라이언트는 이번 작업에 만족하여, 인근에 레스토랑 설계도 부탁해왔다. 현재 허가까지 다 받은 상태로 올가을에 공사를 진행한다. 신기해로와는 또 다른 콘셉트로 브랜드 정체성을 이어갈 예정이니 기대해 달라. (웃음)
한: 최근 건축가가 카페를 작업하는 비중이 늘고 있고, 라움건축사사무소 역시 1년 사이 신기해로를 포함해 네 개의 카페를 설계했다. 카페를 다룰 때 중요시하는 지점과 건축적 태도가 있다면 무엇인가?
오: 최근 카페를 설계하면서, ‘한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방문하기 위한 카페 건축은 어떠해야 하는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해답은 다양한 내부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신기해로 역시 영역별로 바닥 높낮이를 달리하고, 레벨마다 시각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한 지점에 서 있을 때 실내 전체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양한 공간 변화로 궁금증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곳을 경험하기엔 한 번으론 부족하고 최소한 다섯 번은 와야 카페를 다 누리게 된다.
그다음, 카페에는 적정한 공간 크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정한 좌석 수, 적정한 통로 폭과 화장실 면적 등, 이를 넘어서는 건 낭비다. 특히 자리에 앉았을 때 펼쳐지는 시선 안에 손님이 20명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테이블 수를 조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카페가 아무리 대형화된다고 하더라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예식장 같은 느낌을 피할 수 있다.
카페 건축은 일반인이 건축의 안목을 높이는 데 좋은 도구다. 내가 한 카페 대부분은 담장이 없거나 높이가 매우 낮아 쉽게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이 카페라는 건축이 취해야 할 공공성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카페는 다른 용도보다 콘셉트를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어 건축가의 어떤 아이디어도 수용할 여지가 많은 분야다. 이런 면에서 카페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앞으로 새로운 건축 유형이 될 수도 있다.
한: 라움건축사사무소는 그동안 부산을 주 무대로 활동해왔다. 부산도 여느 도시처럼 동네가 뜨고 지며 건물이 새로 들어서거나 없어지는 등 여러 변화를 거쳤는데, 이곳의 건축 흐름과 이에 대한 생각도 들어보고 싶다.
오: 지난 10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 건축은 존재감이 부족했고, 부산의 건축가도 유명세를 타지 못했다. 부산에서 좋은 건축이라 평가받는 것은 대형 공공건축물이거나 해외 건축가의 건물이었고, 가끔 서울의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작업이 간간이 생기는 정도였다. 그 당시 새로 들어선 건물은 작품성보다는 경제적 가치에 치중한 것들이 많아, 오히려 사라져가는 건물보다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어느덧 10년이 지난 지금은 좋은 동료와 아틀리에가 많이 늘었고, 잘하는 후배 건축가들도 지역에 정착하고 있다. 물론 수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우리끼리 교류를 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나아가 우리를 통해서 좋은 품질의 건물을 만들려는 시공사도 생기고, 의뢰인들도 한 명 한 명 좋은 건물에 대한 인식을 바꿔가는 중이다. 여전히 수도권에 비해 기능공의 실력이나 투자 비용 등에서 차이가 나지만, 부산 건축은 가능성이 크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지금처럼 지역 건축가들이 소신을 가지고 자신만의 작업을 해나간다면 부산의 건축문화는 더욱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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