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5년 5월호 (통권 690호)
중국 건축가가 두 번째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지금, 「SPACE(공간)」는 잘 알려진 일본 건축과는 달리 제대로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중국 건축에 주목한다. 중국에서는 1978년 개방정책 시행 이후 새로운 설계 환경이 펼쳐졌고, 이 시기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들이 1990년대 이후 건축 담론을 주도했다. 이번 특집의 주인공, 장융허는 이러한 시류의 가장 중심에서 근현대 중국 건축을 이끌어간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인터뷰를 진행한 정인하(한양대학교 교수)는 동아시아 근현대건축사를 서구에서 수입된 모더니티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모더니티가 오랫동안 공존해오다 하나로 수렴됐다고 해석하는 학자로, 장융허의 건축 또한 동아시아 근현대건축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본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장융허의 건축을 통시적으로, 주제별로 훑어나가며, 중국 근현대건축 또한 이러한 흐름을 따랐음을 펼쳐 보인다.
스플릿 하우스(2002). 다양한 아시아 지역 건축가들과 협업한 코뮨 바이 그레이트 월(2002)에서 장융허가 설계한 주거용 건물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집은 기존의 수목을 보존하기 위해 절반이 나뉜 모양으로 설계됐다. 이러한 형태는 공용 공간과 사적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자연 풍경을 거주 공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프로젝트는 베이징의 밀집된 도시 맥락에 적응한 전통적인 중정형 주택, 사합원을 자연 경관 속으로 이식하려는 시도이자, 계곡에 위치한 주택에 대한 유연한 프로토타입이며, 쉽게 해체 가능한 건축물을 지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중국 건축의 모더니티
정인하: 먼저 중국 건축의 모더니티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동아시아 건축에서 두 가지 유형의 모더니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서구에서 수입된 모더니티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의 생활 방식을 반영한 모더니티다. 동아시아 건축사에서 이 두 가지 모더니티가 오랫동안 공존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로 수렴되었다. 다만, 그 전환 시기는 국가별로 달랐는데, 일본에서는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중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다고 본다. 이는 동아시아 근현대건축의 흐름을 설명하는 중요한 틀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
장융허: 이를 시간적 틀에서 설명하기보다는, 건축이라는 분야와 직군이 중국에 도입된 과정을 단순화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모든 문화권에서 건축 행위를 해왔고 하고 있지만, 지금 이야기하려는 건축은 기본적으로 서구에서 시작되어 도입된 개념이다. 아마 건축가라는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부터 명확한 직업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건축은 특정한 지식 체계를 가진 학문적 분야가 되었고, 전문 직업이 됐다. 중국의 경우,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공부한 중국 유학생들이 이런 개념을 처음 도입 했는데, 지식 의 집합체라기보다는 양식과 관련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유학생들은 주로 고전주의 건축을 공부했다. 그런데도 이들이 파리가 아닌 필라델피아로 간 이유는 당시 파리에서 교육 방식이 변화해 건축도 사회적 실천으로 변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방식으로 건축을 가르치던] 교수들도 직업을 찾아 파리를 떠나곤 했다. 주로 고전주의의 그늘 아래에서 건축을 배우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간 유학생들은 양식적 언어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이념적 요소도 받아들였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 이들은 매우 아름다운 건물을 설계했다. 많은 이들은 고전주의적 디자인을 주된 작업 방식으로 삼았지만, 일부는 모더니즘 계열의 건축도 설계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더니즘은 단순한 형식적 연습이거나 스타일적 실험에 불과했다. 이것이 1920년대 초반의 중국 상황이었다. 양팅바오▼1 와 같은 건축가들에게 이러한 연습은 매우 중요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가장 뛰어난 모더니즘 건축 작품들은 그가 설계한 고전적인 건축보다 우수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1920년대 초반의 중국 유학생들은 모더니즘을 전혀 모르던 것은 아니었지만, 모더니티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모더니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단지 설계 능력을 익혔을 뿐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중국 [근현대건축의] 2세대 건축가들을 가르쳤는데, 내 아버지▼2 도 이 세대에 속한다. 모더니즘 건축가는 아니었고 아르데코 스타일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확실히 2세대 건축가들은 스타일적으로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일례로, 내가 역사가가 아니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중국에는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일한 건축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에는 최소한 두세 명은 있었지만 말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싱가포르의 건축가 윌리엄 S. W. 림▼3 이 그의 저서 『Postmodern Singapore』(2002)에서 싱가포르에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동시에 등장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의 고전주의와 모더니즘 간의 순차적 이행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은 초창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아마도 1980년대에 고전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윌리엄 S. W. 림 자신도 실무자로서 피플스 파크 콤플렉스(1972)와 골든 마일 콤플렉스(1974)를 설계한 바 있다.
더 베이(2010). 약 45헥타르 규모의 프로젝트 부지는 상하이 칭푸 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때 생태적인 환경을 갖춘 어장으로 사용됐다. 이러한 맥락에 따라 이 주택은 ‘분산’, ‘중정’, ‘정원’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설계됐다. 또한 회색 석재, 알루미늄 합금 재질의 창호 및 지붕, 벽을 구성하는 강재 프레임 등 비전통적인 건축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남부 지역의 전통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는 박공벽과 경사지붕의 형태를 차용해 지역적 전통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Shu He
난징과 미국에서의 건축 교육
정인하: 당신은 이제껏 이야기한 중국의 2세대 건축가의 다음 세대다. 중국 근현대건축사 속에서 3세대 건축가들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당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짚어보고 싶다. 베이징에서 나고 자랐지만, 난징공업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길을 선택했다. 특별히 난징에서 건축을 공부하게 된 동기가 있었나? 아버지가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까?
장융허: 그렇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지속되는 10년 동안 대학들이 폐쇄됐다. 나는 1977년에 대학에 지원했는데, 그해가 문화대혁명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 입학시험이 다시 시행된 해였다. 처음에는 미술학교에 진학해 유화를 공부할까 생각했다. 지금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다. 그래서 친척들과 친구들이 미술학교에 지원하지 말라고,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조언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건축을 고려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건축에서는 아주 잘 그릴 필요가 없으니까. 수학 성적도 형편 없었지만, 건축에서는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의 트라우마로 인해 많은 대학들이 그해에 문을 열지 못한 상태였고, 그해 나는 단 두 곳의 학교만 지원할 수 있었다. 톈진대학교와 난징공업대학 중 결국 난징공업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정인하: 당시 난징공업대학의 커리큘럼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장융허: 당시 난징공업대학의 건축 교육은 보자르 스타일, 즉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접근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드로잉과 렌더링을 동시에 배웠고, 렌더링에는 수채화나 중국 먹을 사용했다. 하지만 교수님들은 형태나 미학적인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전적인 기술을 익혔지만, 고전주의를 미학적 체계로서 깊이 있게 논의하지는 않았다. 스튜디오는 작은 규모에서 큰 규모의 건축물로 확장되는 방식이었다. 처음 1학년 때는 작은 우체국을 설계했고, 점점 프로젝트 규모가 커졌다. 학교, 오피스 빌딩, 극장 등 점점 더 복잡한 건축물을 다루게 됐다. 논리적 사고를 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손을 훈련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기뻤다. 그래서 우리는 학부생에게 개방되지 않은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같은 건축가들의 작품을 찾아보곤 했다. 그들의 작품은 우리에게 신선하고, 새로운 감각을 주었고, 젊고 혁신적으로 보였다.
정인하: 난징공업대학에 다니면서 멘토 역할을 해준 인물이 있었나?
장융허: 1학년 스튜디오를 담당했던 쑨종양▼4 교수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매우 엄격한 분이셨다. 교수님께 배운 바를 이해하는 데, 이 일화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첫 번째 프로젝트, 작은 우체국 설계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렌더링 작업을 하는 중이었는데, 벽돌 하나하나를 전부 그려 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도면이 너무 딱딱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몰랐고, 결국 모든 벽돌을 다 그려 넣게 됐다. 그때 쑨 교수님이 오셨고, 교수님께 사실은 이렇게 그리고 싶지 않았고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제대로 했다. 이것이 건축이다.” 당시에는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수님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돌이켜보면, 쑨 교수님은 이미 건축을 매우 본질적인(ontological) 관점에서 사고하고 계셨던 것 같다.
정인하: 다음은 미국 유학시절에 관한 질문이다. 첫 대학으로 볼 주립대학교를 선택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장융허: 나는 1978년 난징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그 무렵은 중국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마침 볼 주립대학교의 건축학과 교수 마빈 로젠먼이 중국을 방문하고 싶어 했다. 중국에 관심이 있었고 중국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비자 신청이나 방문 절차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그러던 중 그가 주부들을 위한 「하우스 앤드 가든」이라는 잡지를 읽다가 한 중국 건축가의 인터뷰 기사를 발견했고, 그 건축가는 바로 내 아버지였다. 그는 잡지사에 연락해 아버지의 연락처를 요청했고, 아버지는 그를 중국 건축학회에 소개했다. 그렇게 로젠먼 교수는 볼 주립대학교 학생 19명을 데리고 중국의 주요 건축학과가 있는 네 도시를 방문할 수 있게 됐다. 당시 나는 난징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로젠먼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이후 아버지가 로젠먼 교수에게 내가 그들과 함께 중국에서의 일정을 같이 하지는 않더라도, 이후 미국으로 데려가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버티컬 글라스 하우스(2013). 1991년 신건축 주택설계공모에서 명예 언급을 수상한 계획안을 2013 상하이에서 열리는 웨스트 번드 건축 및 현대 미술 비엔날레의 상설 파빌리온으로 실현한, 고밀도 현대 도시를 위한 프로토타입이다. 수직성 속 투명성의 개념이 담긴 이 집은 모더니스트의 수평성 속 투명성에 대한 비판적 시간을 견지하며 ‘살아 있는 기계로서의 건축’이라는 현대 이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Lyu Hengzhong
_
1 양 팅바오(杨廷宝, 1901~1982)는 중국의 1세대 현대건축가로, 류둔전(刘敦桢, 1897~1968), 뤼옌즈(吕彦直, 1894~1929), 량쓰청(梁思成, 1901~1972), 통쥔(童寯, 1900~1983)과 함께 중국 5대 건축 거장이라고 불린다. [중국 건축 출판계에서 유명한 인물인 양융성(楊永生, 1931~2012)의 저서 『건축오종사(建筑五宗师)』(2005) 참조.] 그는 류둔전, 통쥔과 함께 둥난대학교에 건축학과를 창시한 1세대 둥난대 건축학 교수이기도 하다. 칭화학당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미국에서의 유학 이후 중국에 돌아와 기태 엔지니어링(基泰工程司)을 설립하고, 랴오닝 중앙역, 둥베이대학 마스터플랜 및 도서관, 화학관, 기숙사 건축 등 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 장 융허의 아버지인 장카이지(张开济, 1912~2006)는 저장성 항저우 출신의 건축가다. 난징공업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베이징건축디자인원의 수석 건축가를 역임했으며, 마오쩌둥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3 윌리엄 S. W. 림(1932~2023)은 홍콩 출생의 싱가포르 건축가다. 그는 1950년대에 영국의 AA 스쿨과 하버드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1960년 림총캣(Lim Chong Keat), 첸분피(Chen Voon Fee)와 함께 말라얀 아키텍츠 코 파트너십(Malayan Architects Co-Partnership)을 설립했고, 이후 1967년에는 타이헹순(Tay Kheng Soon), 코세우촨(Koh Seow Chuan)과 함께 디자인 파트너십(Design Partnership, 이후 DP Artchitects로 재편됨)을 설립했다. 말라얀 아키텍츠 코 파트너십은 싱가포르 지역에서의 모더니즘적 혁신으로, 디자인 파트너십은 이 지역에 브루탈리즘을 도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후 윌리엄 림 어소시에이츠(1992~2002), 아시안 어반 랩(2003)의 설립자로서 실무를 계속해왔다. 또한 그는 아시아의 건축, 도시주의, 문화, 사회정치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Asian New Urbanism』(1998), 『Alternative (Post)modernity』(2003), 『Contesting Singapore’s Urban Future』(2006), 『Asian Alterity With Special Reference to Architecture and Urbanism through the Lens of Cultural Studies』(2008)를 비롯한 13권의 책을 저술했고, 2권을 편집했다.
4 쑨 종양(孙钟阳)은 둥난대학교 교수로 둥난대 건축학과의 3세대 학자로 분류되는데, 동료 교수인 중순정(鄭勳正), 왕원칭(王文卿)과 함께 ‘정양칭 그룹(正阳卿小组)’을 창립해 활동하며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양칭 그룹의 목적은 산업, 학계, 연구의 통합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함께 『건축제도(建筑 制度)』와 같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