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3년 12월호 (통권 673호)
‘오늘의 건축가’는 다양한 소재와 방식으로 저마다의 건축을 모색하는 젊은 건축가를 만나기 위해 기획됐다. 그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탐색하고, 고민하고 있을까? 「SPACE(공간)」는 젊은 건축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보다는 각자의 개별적인 특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인터뷰는 대화에 참여한 건축가가 다음 순서의 건축가를 지목하면서 이어진다.
인터뷰 김명재, 최여진 플롯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 × 윤예림 기자
땅과 닿은 곳에서
윤예림(윤): 오는 길이 제법 순탄치 않았어요. 언덕을 열심히 올랐는데 곧바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오더라고요.
최여진(최): 골목길로 오셨나봐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죠. (웃음) 그 뒤에 또 오르막이 나오잖아요.
김명재(김): 서울에 아직 이런 지역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죠. 보광동으로 사무실을 옮겨온 지 1년 반 정도 됐는데, 지내면 지낼수록 재미있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어요.
윤: 어떤 점에서요?
최: 시장의 쌀가게에서는 쌀을 되로 팔아요. 보광동 토박이분들도 아직 많이 살고 있고요. 서울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잖아요. 그런데 사무실 뒤쪽으로는 대사관이 많아 분위기가 달라요. 상반된 성격을 양면에 가지고 있는 이상한 동네죠.
윤: 보광동을 찾아오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최: 첫 사무실은 송파구 문정동에 있었어요. 오피스가 많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 환경은 편리했지만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우선 땅과의 접점이 없었죠.
김: 건물 정면이 땅과 접하는 공간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우연히 이 건물을 발견했어요. 1층부터 옥상까지 쓸 수 있는 걸 보고 바로 “여기다, 가자” 했죠.
윤: 확실히 땅과 사람에게 접하는 구석이 많아 보여요. 1층은 유리문으로 완전히 개방해 쓰고 계시잖아요. 불편할 법도 한데요.
김: 카페인 줄 알고 문 열고 들어오는 분도 많았어요. (웃음) 지나가는 분들이 많이 들여다보기도 하고요.
최: 1층에 작업 공간을 둘지 회의실을 둘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작업 공간을 아래 둬서 1층을 활성화하는 게 도시적인 측면에서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회의실은 비어 있을 때가 많으니까요.
윤: 작지만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에요.
최: 예전에 자동차 정비소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하더라고요. 직각인 모서리가 하나도 없는 사다리꼴 형태예요. 작은 공간에 가구도 놓고 계단도 다시 배치하느라 애를 많이 썼어요.
김: 사실은 건물 옥상에 반해서 왔어요. 위에서 점심 식사도 하고, 회식도 많이 해요. 최근에 플롯건축사사무소(이하 플롯) 5주년 기념 세미나도 열었는데, 이런 공간이 아니었다면 시도해볼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둘이기 때문에
윤: 두 분의 인연이 16년째라고요. 연예계에 다비치가 있다면 건축계에는 플롯이 있네요.
김: 그 정도인가요? (웃음) 2007년에 영국에서 처음 만났어요.
윤: 오랜 시간을 함께한 파트너를 만난 건 행운이죠. 첫 만남이 궁금해요.
김: 학기 시작을 앞두고 바틀렛 건축학교 출신 한국인 모임에 나갔는데 여자분이 딱 한 명 앉아 있던 장면이 아직도 생각나요. 저는 영국에 막 도착해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을 때였고, 최 소장님은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어요.
최: 가뜩이나 한국인이 적은데 여자 학생은 더 드무니까 유대감이 생겼죠. 어쩌면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예요.
윤: 필요가 다하고 관계가 희미해질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김: 관심사가 비슷해 계속 공유하다 보니 관계가 이어진 것 같아요. 틈만 나면 건축, 전시, 공연 할 것 없이 같이 보러 다녔어요.
최: 특히 음악을 좋아해서 클래식 공연을 많이 즐겼어요. 유럽은 좋은 공연을 저렴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많거든요. 공연장들의 연간 프로그램이 나오면, 관심 있는 공연을 골라서 1년치씩 예매를 해버렸어요. 그리고 김 소장님한테 날짜를 알려주면 두말없이 함께했죠. 나중엔 런던뿐 아니라 유럽 곳곳을 누비면서 공연을 보고 건축 답사도 하는 식으로 일이 커졌어요. (웃음)
윤: 완벽한 문화생활 짝꿍이네요. 한국에 와 플롯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최: 저의 경우 영국에서 다른 문화와 작업 방식들을 경험하는 것은 좋았지만, 한국에 돌아가 나의 위치를 확보하려면 적정한 시점이 언제일지 하는 고민이 계속 있었어요. 그러다 브렉시트가 일어났죠. 다양한 문화를 포용한다고 생각해왔던 나라의 이중적인 면들을 보게 됐어요.
김: 어느 날 퇴근하고 같이 밥을 먹다가 최 소장님이 “더 좋지 않은 상황을 안 보려면 한국에 가야겠다”라고 한 농담을 제가 덥석 물었어요. 사실 전 외국이냐 한국이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어요. 다만 내가 원하는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죠. 실패를 하더라도 이 갈증을 해소하려면 도전을 해보는 수밖에 없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윤: 서로 다른 생각을 했지만 함께 돌아왔네요. 혼자가 아니라 든든했겠어요.
최: 둘이 사무실을 운영하다 보면 가족이나 부부도 아닌데 의견을 조율하기 힘들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데, 오히려 둘이기 때문에 좋은 점이 많아요. 한국에는 제가 1년 먼저 들어왔거든요. 당시 김 소장님과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없으니 때로는 홀로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들도 있었는데, 그게 부담스럽고 무섭기도 하더라고요. 사소하더라도 나의 결정을 지지하고 함께 확신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끼리는 우리 생각이 맞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윤: 두 분은 최소한 한 명의 지지자를 확보한 셈이에요. 반면, 각자의 강점이 발휘되는 순간도 있을 것 같아요.
최: 서로가 서로에게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무실 운영에 많은 도움이 돼요. 연인들이 반대인 성향에 끌린다는 말이 있잖아요. (웃음) 김 소장님은 기획이나 디자인의 큰 틀을 잡거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강해요. 반대로 저는 완벽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어서 제 기준에 도달하기 전까지 부여잡고 있는 편이거든요. 가끔 김 소장님한테 그만 좀 놓으라고 혼도 나죠.
김: 주로 제가 앞뒤 생각 안 하고 벌여놓은 일을 최 소장님이 수습하는 식인 것 같아요. (웃음) 제가 놓친 디테일들을 채워주고 필요한 조언도 해줘요.
플롯건축사사무소 사무실
열린 문을 오가는
윤: 플롯은 공공 프로젝트를 주로 해왔어요. ‘완공 후에도 문이 열려 있는 건물을 설계하고 싶다’고 말씀한 적도 있죠.
김: 런던에서 5년에 걸쳐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있었거든요. 매일같이 들락날락한 현장인데 완공이 되고 나니 보안 때문에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서운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언제든 문이 열려 있는 건물을 짓고 싶었어요. 의도한 건 아닌데, 한국에서는 활짝 열린 건물들을 많이 설계하고 있네요. (웃음)
윤: 영국에서 해오던 방식과 많이 다른 경험을 했겠어요. 실무적인 어려움도 있었을 테고요.
최: 사회적 속도가 다르다는 걸 크게 체감해요. 한국의 사회적 속도를 따라가려면 영국의 두 배 이상의 속도로 달려야 해 버거울 때가 있어요. 경제성의 관점에서 속도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지만, 빠르다고 언제나 가장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잖아요.
윤: 돌아가는 길이 빠를 때도 있죠.
김: 하지만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에 앞서 완성된 결과만을 바랄 때가 많아요. 좋은 결과를 위해선 수많은 실험과 연구가 필요한데 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건축가 개인의 시간과 자원을 쪼개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반면 영국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들은 건축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충분히 탐구한 뒤 건축가를 찾는 편이었어요. 요구가 명확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했죠. 사회적으로 건축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윤: 지난 11월호에서 ‘설계공모, 10년의 경험’ 특집을 통해 공공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겪는 수많은 고초를 들었어요.
김: 프로젝트에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건축가인 우리뿐인 것 같고, 외로운 싸움을 하는 느낌이 들곤 해요.대부분의 발주처는 더 좋은 선택지를 두고, 조금이라도 책임이나 위험 부담이 덜한 쪽을 선택하는 일이 다반사죠. 그래도 반대로 생각하면 한국에는 정부가 주관하는 공공 프로젝트가 많은 만큼 젊은 건축가에게 열린 기회가 많다는 건 긍정적이에요. 우리도 공공 프로젝트로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 못 했거든요. 건축가로서 공공성에 기여할 기회가 있어 기쁘죠.
윤: 기억에 남는 발주처나 프로젝트가 있나요?
김: 공주에서 오랫동안 진행하고 있는 나태주 시인의 문학관 프로젝트가 있어요. 중요한 발표나 회의 자리마다 오셔서 고생 많다, 고맙다 말씀을
해주던 나태주 시인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별것 아닌 그 한마디들이 참 따뜻했어요. 설계에 대한 노력을 순수하게 알아주고 고마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지 않으니까요.
최: 얼마 전 착공식이 있어서 갔는데, 행사가 끝나고 따로 불러서는 풍금을 연주해주셨어요. 나태주 시인의 풍금 연주는 흔치 않은 이벤트라고
들었거든요. (웃음) 저희와 직접적으로 일을 한 건 아닌데도 말 못할 힘든 과정들을 짐작하고 이해해주는 듯한 마음이 전해지더라고요.
©Plot Architects
©Plot Architects
꺼내고 발굴하는
윤: 플롯은 ‘플롯’의 두 가지 뜻이기도 한 땅과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죠. 플롯이 정의하는 좋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듣고 싶어요.
김: 좋은 이야기란 없다고 생각해요. 이야기 자체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있는지가 중요하죠. 그래서 이야기는 구체적일수록 좋아요. 시나리오가 구체적일수록 사용자에게 알맞은 디자인이 가능하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끌어내고, 공감하고, 상상해서 공간에 잘 담아내는 것이 우리의 몫인 것 같아요.
윤: 좋은 공간에 필요한 것은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능력이겠네요.
최: 저희가 많이 놀고, 여행하고, 경험하려고 하는 이유예요. 공연을 보러 가서는 관객의 관점에서, 또 연주자의 관점에서 콘서트홀을 바라볼 수 있죠. 운동을 하러 가서 ‘이건 좀 불편하네’ 생각할 수도 있고요. 설계자가 아닌 사용자로서 다양한 입장을 경험하며 쌓은 공감 능력이 이야기를 발굴하는 능력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윤: 내 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거네요. 소장님들의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김: 우리가 늘 잡담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흰 도화지에 이상적인 그림을 그려보라 한다면, 우리가 직접 기획, 설계한 공간에서 그 안에 담길 소프트웨어를 찾아 운영까지 해보고 싶어요.
윤: 최근 이 공간에서 연 5주년 세미나가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김: 처음에 옥상 공간을 보고 꿈꾼 일을 5주년을 핑계 삼아 실천하게 됐어요. ‘주목받는 기술을 접목한 건축 분야의 새로운 작업 방식’을 주제로 한국형 프리패브 건축, 소규모 설계사무소의 BIM 내재화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죠.
최: 건축이 동시대에서 가장 느린 속성의 산업이잖아요. 건축과 접목한 드론, 프리패브, BIM, 인공지능 등이 새로워 보여도, 사실 새로운 기술들은 아니에요. 플롯은 모든 프로젝트를 BIM 기반으로 진행하고 있고 프리패브를 일부 프로젝트에 적용해보고 있는데,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어요. 영국에서는 DfMA(Design for Manufacturing and Assembly)라는 프리패브 건축 방식이 상용화되고 있거든요. 시공사와 건축가가 협업하며 디자인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구현할 수 있을지 활발하게 논의하죠. 이러한 방식을 한국의 실정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일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윤: 플롯의 앞으로 5년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김: 사실 지금까지 완공된 프로젝트들의 아카이브에 묻혀 잠자고 있는 이야기가 많아요. 5년 내내 치열하게 달리느라 끝나고 나면 되돌아보지 못했거든요. 이제 차분히 지난 작업을 되돌아보면서 플롯의 색깔을 뚜렷이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우리의 이야기를 발굴해야죠.
윤: 어떤 색깔이 드러날지 기대가 돼요.
김: 바라는 색이 진한 초록이라고 하면, 지금은 흰 물감에 초록색을 한 방울 떨어뜨린 정도인 것 같아요. 5년 동안 좌충우돌이 많았고 여전히 그래요. 앞으로는 이상향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에요.
최: 이상향을 말하는 것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작품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으로 우리의 색을 말하기 위해 해온 것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찾아 꺼내고, 또 새로운 것을 지어가려고요.
김명재(왼쪽), 김테디(가운데) 그리고 최여진(오른쪽)
김명재, 최여진은 2024년 1월호에서 최수희, 권보준(콜라브웍스 공동대표)의 오늘을 듣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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