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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학생기자] No.670 2023년 9월호 리뷰

18기 SPACE 학생기자
진행
박지윤 기자


-건축스러운 건축

글 박재아(서울대학교 조소과)

무엇이 조각이고 무엇이 건축인가? 서양 예술사 책을 펼쳐보면 조각이 건축의 장식 요소로서 건축의 하위 범주에 머무르던 시기가 꽤 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고대와 르네상스를 지나며 오랜 시간 동안 어떨 땐 건축다운 조각, 조각다운 건축을 만들며 서로의 공간을 오고 가던 건축과 조각은 비로소 19세기부터 조금씩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더니, 현대에 와선 아예 다른 범주의 존재들로 간주한다. 미국의 미술 평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1978)에서 1960년대부터 조각이란 더 이상 조각으로 불릴 수 없는 범위까지 확장되었다고 지적한다. , 더 이상 조각에서는 형태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각은 현대미술로 그 국면이 넘어가면서 새로운 종류의 재료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이 예술적 발견을 계기로 기존의 전통 조각은 한동안 정체된 채 머물렀다. 이제 조각에서 형태가 중요해지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조각의 물질성이 큰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크라우스는 이 시점부터 조각을 풍경이 아닌 것혹은 건축이 아닌 것이라는 범주로 다시 재설정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크라우스에 의하면 건축과 조각이 나뉘게 되는 결정적 시점이 바로 1960년대이다. 나는 크라우스가 조각의 가능성이 가장 확장된 시대에 건축이 아닌 것이라 말한 점이 흥미롭다. 아무리 조각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전통적 재료를 벗어나 구조적인 고민을 하고, 사람과 시간성을 그 안에 녹여내어도 조각은 건축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과거엔 조각과 건축은 모두 공간을 점유한다는 특성을 가져 그 경계를 자유롭게 오고 갔음에도 이젠 정말 건축과 조각이 서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든다.

네임리스 건축(공동대표 나은중, 유소래) 또한 이와 비슷한 고민 속에서 -건축조각으로 도치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을 한 것은 아닐까? 콘크리트월(2023)의 긴 수평 창 앞으로 나열된 의자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프레임의 의도대로 앞 풍경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이 흐른다. 그 시선의 끝에는 두꺼운 콘크리트 슬래브 위에 돌들이 올려져 있다. 돌과 수평인 높이에서 돌과 함께 시공간을 점유하는 느낌은 분명히 특별한 감각으로 다가올 것이다. 자연스럽게 돌과 콘크리트의 물성에 집중하게 된다. 특이한 모양으로 뚫린 천창과 돌은 흡사 설치미술과 비슷한 감상을 가져다준다. 넓은 콘크리트 슬래브는 사람들에게 돌을 편하게 감상하게 도와주는 넓은 좌대 같다는 느낌 또한 선사한다. 콘크리트가 건축이라면, 돌은 조각인가? 어디까지가 조각이고 어디까지가 건축인가. 이젠 어쩌면 이 둘을 나누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진 걸지도 모르겠다는 모호한 생각까지 다다를 때, 네임리스는 그런데도를 말하며 이 두 존재의 범위를 미묘한 감각을 통해 구획한다.

건축평론가 박정현의 단어를 빌려보자면, 네임리스 건축은 아티큘레이션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건축에서 아티큘레이션은 통상적으로 구분을 위해 사용된. 네임리스 건축은 왜 굳이 한 발짝 더 나아간 벽, 묘하게 어긋나는 단, 혹은 때론 과감하게 나아간 필로티를 통해 건물의 요소 사이사이를 구분하고자 하는가. 이는 건축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네임리스 건축은 콘크리트를 인공적인 로 생각하고 콘크리트와 돌, 건축과 자연, 건축과 조각을 일직선상에 두어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리지만, 그럼에도 건축과 돌이 한 덩어리로 동일시되지 않도록 미약한 장치를 심어둔다. “콘크리트는 콘크리트이고 벽은 벽이며 바닥은 바닥이다.” 결국 네임리스 건축의 콘크리트는 콘크리트고 돌은 돌이다. 반복되는 아티큘레이션 덕분에 방문객들은 건축물을 건축물로 인식하면서 돌과 콘크리트를 마냥 편하게 동일시하지 못하게 된다. 감상자는 두 범위를 동일시하려는 찰나에 계속해서 이 몰입을 깨버리는 건축의 아티큘레이션을 느끼며 그 경계선을 넘나든다. 돌을 바라보는 이들은 돌이 가지는 중력과 이를 딛고 서 있는 건축물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둘 사이의 충돌을 인지하게 된다.

네임리스 건축은 계속해서 곡선과 직선, 자연과 인공, 콘크리트와 돌과 같은 경계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건축은 경계를 짓는 행위라는 점에서 네임리스 건축의 모호함은 다소 -건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세한 관찰을 통해 네임리스 건축이 디테일 속에 숨겨놓은 콘크리트는 콘크리트라는 답변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답은 건축가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답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네임리스의 건축이 과거의 조각다운 건축의 현대적 해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 호를 읽으면서 매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완전히 불완전할

 조범희(경희대학교 호텔경영학과, 주거환경학과)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상이 대립적 요소들로 양분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관을 바탕으로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사상의 중심인 존재와 비존재에 관하여, 존재하는 것의 성질을 있지 않은 것은 없다라는 명제에서 연역적으로 도출하며 논리를 전개한다. 그는 말하고 생각하기 위해선 그 대상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 대상은 없다가 있게 된 것이 아닌, 오로지 있기만 하는 것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것항상 있는 것이기에 그에게 탄생과 소멸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결국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단순하고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아닌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빌려와, 이항 대립적 요소들의 가치판단에 의문을 제시한다. ‘빛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 가벼움과 무거움, 존재와 비존재. 무엇이 긍정적이고 무엇이 부정적인가?’

설계 수업 당시, 악보를 분석하고 요소와 느낌을 바탕으로 입체화하는 것이 과제였다. 이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선택하였는데, 책의 내용과 노래의 느낌 등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가벼움과 무거움을 주제로 악보를 입체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가치판단은 차치하고, 악보와 음악상 무거운 또는 가벼운 분위기를 가르는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할지 막막한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입체화까지 연장되어 어느 지점부터 무거움의 공간으로 설정할지,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의문이 생겨났다. 각자가 생각하는 경계는 모두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9월호 프레임에서 조명된 네임리스 건축(공동대표 나은중, 유소래)이 나열한 콘크리트와 돌’, ‘물질과 비물질등의 대립 요소, 그 사이에 새롭게 그린 경계에 관한 글은 나의 의문을 상기시켰다. 건축에서 경계에 관한 논의와 결과물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렘 콜하스는 시애틀 도서관에서 연속적 이동을 위해 층간 경계를 모호하게 하였고, SANAA는 롤렉스 센터를 비롯한 모든 프로젝트에서 중심의 탈피, 경계의 모호함, 투명성 등의 일관된 양상을 보여왔다. 같은 건 없다. 건축가 각자가 생각하는 관계와 경계가 모두 다르고, 매번 새로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연장선상에, 네임리스 건축 역시 그들만의 경계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작업을 통해 이야기한다.

콘크리트월은 자연과 인공, 안과 밖, 콘크리트와 돌 등의 관계에 대한 네임리스 건축의 고민과 답이다. 땅속으로 들어가며 시작되는 카페 콘크리트월에서 방문객들이 처음 대면하는 것은 사선으로 깎여나간 듯한 벽이다. 시간의 축적에 따른 풍화가 진행된 느낌을 자아내는 벽, 그 뒤로 보이는 무성한 녹음. 마치 먼 미래에는 두 경계가 동화되어 어디가 자연이었고 건축이었는지 모호한 장소로 남게 될 법한 인상을 준다. 그러한 상상에 현실성을 더해주는 장치가 콘크리트자체이다. 콘크리트월의 콘크리트는 대부분 그 표면을 의도적으로 거칠게 만들어 낸 치핑 콘크리트이다. 콘크리트는 자연의 돌과 근본적으로 같은 성분과 생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액체의 돌이라는 네임리스 건축의 생각은 여기서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모든 콘크리트가 그런 것은 아니다. 바닥과 천장은 매끈하게 표현해 구분되는 지점을 만든다. 상층부로 이동하다 보면, 이 구분이 더욱 극적인 공간을 마주한다. 군데군데 뚫린 개구부와 그 아래 놓인 돌이 인지되는 공간. 개구부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거친 벽과 매끈한 바닥, 그리고 돌에 스미며 그것들의 물성을 극대화한다. 상층부에 다다르면, 방문객들은 카페 진입 시 지난 슬라브가 곧 자신들이 디디고 있는 바닥과 같은 레벨임을 인지하고, 슬라브 위에 올려진 돌을 통해 다시금 콘크리트와 돌의 병치를 풍경으로 사유하게 된다. 모든 시퀀스는 자연과 인공, 안과 밖, 콘크리트와 돌을 구분하는 것이 유의미한지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네임리스 건축은 그 모호한 관계와 경계를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고, 그 사이를 오가며 이들을 오묘하게, 그들만의 정의를 통해 가른다. 박정현은 크리틱 콘크리트는 콘크리트다에서 콘크리트월은 동일한 재료를 통해 바닥과 벽을 구분하며 자연의 돌과 콘크리트가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작업이라고 말한다. 대립적이라고 인지되는 두 관계에 대한 의문에서 작업을 출발한 네임리스 건축은 기존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들을 동일선상에 두지만, 완전한 하나로 만들지 않으며 그것이 목적도 아니다. 오히려 구분되는 지점을 통해, “콘크리트는 콘크리트이고 벽은 벽이며 바닥은 바닥이다.”를 무의미한 동어반복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그들이 같다고 여기는 것을 강조하며 그들만의 경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목적이다. 콘크리트월뿐만 아니라, ‘언덕 위의 집’, ‘동화고 어울림동에서도 그들의 작업방식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우리 건축의 많은 출발점은 익숙한 것들에 대한 의심이고, 질문이다.”라는 어느 인터뷰 속 네임리스 건축의 답변은, 그들의 작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네임리스 건축을 처음 접한 것은 군 복무 시절 서점에서 마주한 완전히 불완전한 사전이었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더 강렬했던 것은 표지의 원이다. 멀리서 보면 완벽한 원인데, 가까이에서 보면 한쪽이 어긋나 틈이 벌어져 있다. 완결성을 지닌 완벽한 원과는 달리, 불완전한 원은 완결성은 부재하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주변과의 호흡 등 새로운 가능성을 통해 충만함을 가진다고 말한다. “불완전함은 또 다른 가능성으로 다가온다라는 인상 깊은 구절을 새기고, 9월호에서 다시 만난 네임리스 건축은 완벽하기보단 조금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요소 사이의 가능성을 꾸준히 탐닉하며 그 사이를 유영해 나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앞으로도 부단히 불완전함 속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나가길 바라며, 그리고 앞으로도 완전히 불완전했으면 하는 이상한 소망을 담아 보내본다. ​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흐리는 물질과 비물질의 대조

글 박민정(영남대학교 건축디자인학과)

 

우리는 보통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두드러지는 건축보다 둘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여 내외부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거나 인공적인 것 속에 자연이 녹아드는 건축을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세계적인 건축 거장들의 대표작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는 최소한의 요소로 만들어진 절제된 평면을 볼 수 있다. 얇은 크롬 기둥은 하중을 받고 벽은 공간을 나누는 역할만 하며 사용된 재료의 특성을 부각시키되 다른 복잡한 요소들은 배제시켰다. 이러한 엄격한 평면은 재료에 집중하며 장식을 배제시킨 벽과 기둥에 집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벽은 공간을 완전히 닫지 않고 동선을 유도하고 공간을 분절하는 용도로 존재해 외부와 내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또한 내부에 의도된 동선을 따라가며 도착한 수공간에서는 물에 비친 빛으로 인해 표면이 흐르는 듯한 효과와 시선 끝에 머무는 조각상이 액자 속 사진처럼 느껴지게 한다. 고정된 특징을 지닌 물질인 조각상, 벽 등이 실체가 고정되지 않은 비물질인 물과 빛과 부딪히고 조화되며 추상적인 하나의 장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에서도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외관은 단순한 박스 형태의 콘크리트 건물 같아 보이지만, 내부에 들어왔을 땐 벽 사이로 스며든 빛이 폼 타이 구멍으로 마감된 콘크리트 벽에 음영을 만들며 물성이 극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평면은 여러 축으로 뻗어 나가는 벽이 직사각형 형태의 예배당을 관통하는 심플한 형태이지만, 관통하는 벽들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공간에 극적인 효과를 가져다준다. 가장 아이코닉한 공간인 십자가 형태의 빛이 들어오는 예배당은 벽의 틈 사이로 자연이 들어오고 외부와 내부 사이를 구분 짓는 유리조차 없어서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도 물질인 콘크리트 벽이 비물질인 빛, 외부의 조경과 부딪히며 아이코닉한 장면을 연출한다.

과거의 자연으로부터 온 형상과 장식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르네상스나 로코코 시대와는 다르게 근대로 접어들면서 하중으로부터 자유로운 평면과 콘크리트, 유리를 사용한 심플한 건물로 건축 양상은 변화됐다. 이 과정에서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뚜렷해지며 수평창, 개구부, 수공간 등의 여러 장치로 자연을 건축물 내부로 받아들이는 방식이 주목받았다. 재료의 물성이 강조되고 내부로 자연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함께 작용하는 공간에서 사람은 절제된 건축 요소와 변화하는 자연이 충돌하는 극적인 장면을 볼 수 있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비물질과 정해진 형태가 있는 물질이 대조되며 그 현상은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흐름 속 네임리스 건축(공동대표 나은중, 유소래)의 자연과 인공의 경계에 천착한 작업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물성에 집중하고 비물질적 요소를 내부로 끌어들이면서 인공과 자연을 대조시키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인공적인 것 속에 자연을 녹여내고자 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경계 지어 경계를 흐리는 시적 건축

김보경(연세대학교 철학과)

월간 「SPACE(공간)9월호 프레임의 에세이 본론은 콘크리트는 액체의 돌이다.”라는 모순적인 문장에서 시작한다. 물은 기체, 액체, 고체 뭐든 될 수 있다. 그런데, ‘액체이라니 이상한 말이다. 액체 형태의 금속이 존재할 수 있듯 진릿값이 있다는 말인지,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이 숨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역설인지 아리송한 마음에 흥미가 일었다. 뒤의 내용을 마저 보니 두 가지 의도가 모두 들어있는 듯했다. 콘크리트와 돌의 근본이 같음을 강조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콘크리트만의 새로운 가능성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네임리스 건축(공동대표 나은중, 유소래)이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특유의 시적인 사고에서 기인한다. 이는 에세이의 형식에서도 드러나는데, 네임리스 건축의 이번 9월호 에세이는 산문 형식이 아닌 짤막한 산문시 같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콘크리트와 돌’, ‘물질과 비물질’, ‘시와 산문’, ‘중력과 인력’, ‘땅과 건축’, ‘구조와 표면’, ‘숲과 건축과 같은 제목에서 두 가지 요소 간의 경계를 규정함으로써 동시에 경계를 흐리는 사고가 드러난다. ‘유연한 그리드’, ‘느슨한 장소에서는 유연하고 흐린 경계에 대한 지향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진짜와 가짜에서는 네임리스 건축의 건축관을 대유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전적 의미를 엄밀하게 따지는 사람에게는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참이라는 의미의 진()짜는 가짜가 될 수 없고,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민 것을 의미하는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개별 주체들과 맞대며 조율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꿈꾸는 사람인 네임리스 건축에게는 가능하다. 사람, 사물, 모든 것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그들에게는 가능함을 넘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네임리스 건축 작업의 형태는 네모반듯하고 단순한 기하학의 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매스들은 주변의 맥락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본인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모습은 일견 경계를 흐리고, 느슨하게 한다는 네임리스 건축의 지향점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번 호의 프로젝트에 실린 ‘화조풍월에서 경계를 흐리는 건축을 더 또렷하게 보았다. 화조풍월은 네임리스 건축의 콘크리트월’, ‘언덕 위의 집처럼 노출콘크리트로 외부와 내부의 마감을 한 건물이다. 마감재만 같은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의 물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공법을 사용해 구축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여기까지는 건축평론가 박정현이 언급한 대로 건축가의 주요 조형 수단이 재료밖에 남지 않은 최근의 흐름일 따름이다.

화조풍월에서 특히 경계의 흐림이 가장 크게 드러난 부분은 건물과 연결된 담장이다. 벽의 아래와 위에 틈을 만들어 사람의 터전과 외부 환경 사이에 틈을 만들어 경계를 흐렸다. 상부는 늘어진 산등선을 따라 시선이 오가고, 하부는 식물들이 자유롭게 경계를 오가며 자라 물리적으로 경계를 없앤다. 삭막한 겨울에는 오히려, 식물이 사라진 자리에 그림자가 경계를 또렷이 만들기도 한다. 담장의 안쪽은 파동이 치는 모양의 벽이 동적인 느낌을 주어 경계의 흐림을 직관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반면, 네임리스 건축은 다양한 구획으로 경계를 짓기에 경계의 흐림이 직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건축의 형태는 경계를 형성하지만,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경계를 흐린다. 사람들의 다양한 행위는 서로 마주치고 부딪히며 관계를 맺고, 이는 경계의 흐림으로 이어진다. 콘크리트월에서는 카페 이용객이 땅 밑으로 내려가는 여정에서, 언덕 위의 집에서는 경사진 언덕과 네모반듯한 집을 오가며 살아가는 거주자의 삶에서, ‘동화고 어울림동에서는 문화, 체육, 식음 등 다양한 행위들 사이에서 부딪힘이 발생한다.

관계성에 주목하여 경계를 흐리는 네임리스 건축의 태도는 아파트들은 담장을 걸어 잠그고, 더 이상 이웃 간 문을 두드리지 않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사용자가 건축가의 의도대로 건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건축을 사용하면서 의도치 않게 경계에서 서로 마주하고, 부딪힐 것이다. 그렇게 상반된 두 대상 혹은 사람이 관계 맺다 보면 네임리스 건축이 설계한 건축에 그들이 추구하는 세상이 담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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