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2023년 11월호 (통권 672호)
[DIALOGUE] 건축가 민성진의 건축적 직관과 아난티 프로젝트
존홍 서울대학교 교수 × 민성진 에스케이엠 건축사사무소 대표
발화는 정식 언어 이전에 존재한다. 문장의 구조를 갖춘 발언 이전에 발생하는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아기들이 옹알이와 울음과 같은 발화를 통해 소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이러한 전-언어적 소리를 ‘원시적인’ 발언 행위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발화를 이론화한 언어학자 디어더 윌슨(Dierdre Wilson)과 댄 스퍼버(Dan Sperbe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단어로 표현되지 않은 수많은 개념들을 갖고 있다. 인류사 전체에 존재한 언어공동체 안에서 1년에 새로 추가되는 단어는 불과 12개를 밑돌지만, 반면 사람의 정신 안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개념의 수는 그에 비해 무궁무진하다.”▼1
발화가 구조적으로 체계화된 생각보다 덜 발달된 형태라는 인식에서 탈피하면, 발화를 일종의 본래적 언어(proto-language), 즉 생성적인 소통 방식으로 여길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수용하면 발화는 그 뜻이 명징하게 정의되는 개념으로 쉬이 환원되지 않는,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암시하는(inferring)’ 그 무엇이 된다. 나아가 발화를 건축의 언어로 치환하면 다이어그램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형태와 공간이 된다.
예컨대 빌라쥬 드 아난티와 아난티 앳 강남에는 형식적 구조, 실험적인 가치, 디자인이 결정되는 프로세스 자체에 많은 발화들이 내재되어 있다. 건축가 민성진과 대화를 나누며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하나의 질문마다 하나의 답변으로 정리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나온다. 그의 답변들은 논리적 설명, 개인적 추억, 추론적 가능성을 유유히 넘나든다. 커다란 프로젝트의 논리 안에서 디테일한 결정들이 건축 요소의 수직적인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되기보다는, 오히려 형태 언어(form-language)가 수평적으로 연결되며 전개되는 구조에 가깝다. 민성진에게 난간에 대한 결정이 전체 도시 조직 안에서 배치를 결정하는 일만큼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다.
물론 에스케이엠 건축사사무소(이하 SKM)의 디자인이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자의적으로’ 종합한 결과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최근 아난티 프로젝트에서 드러나는 건축과 도시 설계의 직관적인 형태는 그간 축적된 경험의 결과다. 오랜 세월에 걸쳐 변모해온 도시의 역사적 장소에 갔을 때 그곳이 형성된 원인과 결과를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듯 말이다. 다양성 또한 겉으로는 상충되는 듯 보이는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진화를 거듭하며 형성된다. 이처럼 아난티 프로젝트에 내재된 발화들이 존재하는 다층적인 이유를 파헤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전-언어적 소통의 속성상 체계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층위의 담론을 만들어내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설계의 다층적인 디자인 결정 과정을 들춰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눠보았다.
대화
존홍(홍): 아난티 프로젝트처럼 다수의 주거 유닛으로 대규모 숙박시설을 조성하는 경우에는 항상 어떤 의도에 따라 유닛을 배열하는가에 대한 도전이 따른다. 배치에 대한 뚜렷한 개념이 없으면 반복적인 아파트 블록에 그치고 만다. 따라서 건축가들은 일반적으로 반복을 피하기 위해 회전, 이동, 스케일 변화와 같은 체계의 변주를 꾀한다. 빌라쥬 드 아난티의 경우 아주 섬세하고도 많은 순열들이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형태적 규칙 이전에 존재하는 설명되지 않은 직관, 즉 발화가 감지된다.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계획 전략을 설명해 달라.
민성진(민): 빌라쥬 드 아난티는 남동쪽에 바다와 잔디광장이 있고, 그 주변으로 여섯 개 복층 유닛으로 구성된 타워, 중간 영역을 형성하는 복합문화시설과 중층 연립형 맨션 그리고 대지 북쪽으로 단독형 빌라가 배치된 대규모 프로젝트이다. 이는 다양한 개체들이 군집을 이루며 형성된 도시의 모습과 흡사하다. 뉴욕이나 파리처럼 다양성을 지닌 도시에 사람들은 매력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SKM은 이곳이 아주 도시적인 체계를 갖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방문객들이 다양한 활력과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으며, 동시에 익숙한 마을 같은 편안함을 주는 장소를 추구하고자 했다. ‘이곳에 와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온전한 쉼의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공간은 일상생활의 편안함과 안락함이 유지되면서도 새로운 감흥과 영감을 주는 환경을 만났을 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장소를 만들기 위해 지형에 순응하며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동선을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인 만큼 반복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숙소의 유형과 장소를 바꾸어 머물 때마다 새로운 에너지와 경험을 주는 곳이면서, 동시에 안락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특히 단독형 빌라 단지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마을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고자 지형을 살려 건축물이 도드라지기보다 주변 나무들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동일한 건물이 반복적으로 늘어선 단순한 풍경을 피하기 위해 단지 안에 중정 열 개를 만들어 숙소로 이동하는 여정에도 변화를 주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을 보면, 큰길에서 진입하면 상징적인 나무가 있는 중앙 마당이 나오고, 이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방향을 찾아간다. 이러한 동선체계가 배치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지붕면의 각도와 향에 따라 매스에 변화를 주었다. 마을이라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지붕의 높이를 3~4m 정도로 하고 주변 조경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홍: 디자인에서 인간의 경험을 극대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떠한 경험을 원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빌라쥬 드 아난티와 아난티 앳 강남의 디자인에는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면서 축적된 경험들이 많이 녹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공감한다. 재료와 건축적 형태가 사람들과 직감적으로 통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민: 기하학적 원칙을 세우고, 다이어그램을 통해 건물의 디자인을 시작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실제 느끼는 경험과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좋은 공간을 느꼈던 경험이나 기억을 발판 삼아 우리가 생각하는 휴먼스케일, 편안하게 느꼈던 기억 속 공간 또는 상상의 장소를 깊게 연구했다. 자유로우면서도 규칙적인 패턴, 임의적으로 설정한 각도가 아니라 지형에 순응하는 축을 사용한 것. 이런 특징들이 관찰과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돌이켜보면 설계 시작점부터 기하학적인 것, 조형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 스케일감, 인간적 경험을 한꺼번에 총체적으로 생각하면서 단지 전체를 디자인했던 것 같다.
건축은 외형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기는 사람들의 행위를 예측하고 이를 위해 보다 나은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아난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우리가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반응과 행동을 데이터와 결과로 확인하고, 다음 프로젝트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경험과 자산이다. 한편 사람들의 취향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해도 그걸 반영하는 시점에는 옛것이 될 수 있다. 미래를 공부하고 예측하여 선택지를 넓히는 일은 폭넓은 가능성과 연결된다. 가능성과 자유로움은 우리가 아난티 프로젝트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
나는 오형제 중 셋째로 자랐다. 어린 시절, 형제들이 감수성 없이 거칠게 자라는 걸 걱정했던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집에서 여러 마리의 강아지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키우셨다. 제법 덩치가 큰 강아지는 바깥에 풀어놓고 키웠는데, 하루는 내가 그 강아지를 데리고 방에서 함께 자겠다고 했다. 온몸에 흙이 묻은 강아지를 집 안에 들이면 털도 날리고 청소도 어려워 반대할 만도 한데 어머니는 나의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며칠 동안 바닥에 요를 깔고 강아지와 함께 잘 수 있었다. 그 경험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즐겁다. 건축가의 직관적 결정도 이와 비슷하다. 보다 나은 창의적인 결과물을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도전한다. 이러한 의사결정 뒤에 따라오는 문제해결에 대한 경험이 쌓여서 우리의 자양분이 된다. 강아지와 함께 자겠다는 아들의 선택이 가져올 문제에 대해 어머니가 예측하고 대처했듯 말이다. 아난티 프로젝트에도 이런 직관적 결정으로 만들어진 요소가 마스터플랜에서부터 디테일까지 곳곳에 존재한다. 누군가는 타워동의 곡선과 화장실의 곡면, 객실 천장의 곡선 마감이 유전적으로 연결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웃음)
홍: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직관적인 ‘발화’가 디자인의 최종 결과물로 직접 이어지는 단일 경로란 존재하지 않는다. 디자인은 탐색의 과정을 요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SKM의 최종 결과물을 보면 굉장한 효율성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고층 타워동(호텔/콘도미니엄)에 적용된 곡선 디자인의 경우, 입면에서 보면 표현적인 제스처처럼 느껴지지만 평면에서 보면 낭비되는 공간이 전혀 없다. 직관적인 발화가 어떻게 합리적인 최종 디자인으로 수렴됐는지 궁금하다.
민: 초기 계획부터 마스터플랜, 건축계획,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하므로 큰 틀에서부터 세부적인 것까지 조율할 수 있었다. 타워동 배면의 곡면을 두고 SKM은 조형성이 강한 디자인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외부 형태는 내부 프로그램들을 구성한 후에 단순히 외피로 감싼 것이 아니라 초기 마스터플랜과 평면 디자인을 하면서 반영된 결과이다. 대지 북쪽으로 단독형 빌라 단지를 배치하면서 프라이버시를 위해 타워동 배면에 창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고, 동시에 입면 디자인 또한 중요한 상황이었다. 기능적으로만 해결한다면 계단실을 객실 입구와 평행하게 배치해 매스를 박스 형태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전체 단지에서 위압적인 건축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배면의 곡선은 계단실의 평면을 현재처럼 구성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으며, 평면과 입면을 동시에 고려한 결과이다. 딱 들어맞는 체계에 따라 논리 정연하게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모형을 제작하고 계속 수정하면서 현재 상태로 발전된 것이다. 높은 타워동에 적용된 곡면은 주문제작한 정교한 메탈 갱폼(gang form)을 층층이 쌓아올리며 타설한 덕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빌라쥬 드 아난티를 만드는 6년 동안, 앞서 5년 동안 작업했던 부산 아난티 코브의 디자인 어휘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변화를 주면서 재료, 색, 평면, 공간, 배치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고 탐구하고자 했다. 인간이 인공지능과 다른 점은 직관이라 생각한다.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은 경험과 직관을 통해서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우리가 끊임없이 실험하며 도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객실 내외부에 다양한 색상을 적용하고 실내 바닥재로 카펫이 아닌 콘크리트 타일을 사용했는데, 우려와 달리 실제 유지관리 측면이나 마감 면에서도 만족스러웠다.
대화를 마치며
이번 대화를 통해 발견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작동하는 직관과 자발적 결정이 개념적으로 깊이가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건축에서는 재료의 물성, 법규, 행동양식, 자연 요소 등 다양하고 복잡한 조건들을 필연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아난티 프로젝트의 경우 직관적인 대응이 복잡하게 중첩된 여러 층위의 문제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면모는 엘리먼트와 컴포넌트에 대한 민성진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엘리먼트가 창문, 천장, 클래딩(외피) 등 우리에게 친숙한 건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라면 컴포넌트는 그것들이 상상력을 통해 결합된 것이다. 지붕선을 만드는 방식, 수공간과 보도, 옹벽 등 하드스케이프가 통합되는 방식, 각기 다른 유형의 주거지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방식은 모두 과거의 경험, 현재의 기술, 미래에 도래할 사회적 요구에 대한 예측을 토대로 하는 여러 층위의 미시적, 거시적 결정에 기반한다. 따라서 벽의 곡선이나 사이트플랜에 적용된 각이 어떻게 도출됐는지와 같은 건축적 발화는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맥락이나 경험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건축가 민성진은 이렇듯 여러 아이디어와 경험이 겹겹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를 ‘유전학’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이번 아난티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직관적인 프로세스는 지난 30여 년 동안 사무실에서 수행한 디자인 연구의 결과, 계속해서 공부하고 발견하는 역사적 선례, 그리고 수년간 많은 도시들을 방문하며 상호작용한 개인적 경험의 집약적 결과물이다. 실제로 빌라쥬 드 아난티와 아난티 앳 강남은 비슷해 보이지만 변형을 거친 유전적 요소들을 공유한다. 이 요소들은 물성이나 기하학과 같은 표면적인 유사성을 넘어 전체를 경험하는 시퀀스라는, 보다 심오한 관계적 원리까지 공유한다.
발화는 의사소통 자체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오히려 다층적 아이디어가 문법과 어휘 등 언어적 규칙에 의해 구성되는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려움을 드러낸다. 윌슨과 스퍼버의 이론에 따르면 “발화를 통해 명시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화자가 말한 내용이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2 그렇다면 건축적 발화 또한 일반적인 말하기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더 발전된 언어 이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방식으로 보면 최근 아난티 프로젝트에 드러난 다층적인 아이디어들은 발생 초기다. 이 아이디어들은 의미와 맥락이라는 관계에 따라 규정되며, 따라서 창작자보다 수용자의 창의적인 해석을 통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아난티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민성진은 디자인을 도식화해 쉽게 설명하는 데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건축적 형태 언어의 의미를 추론하는 최종 작업을 우리에게 맡긴다. (진행 방유경 기자)
1. Deirdre Wilson and Dan Sperber, Meaning and Releva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p. 44 – 45.
2. Ibid.,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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