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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학생기자] No.655 2022년 6월호 리뷰

17기 SPACE 학생기자
진행
오주연, 한가람, 박지윤 기자

 



레디메이드 그 이후

손효지(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SPACE 6월호 아카데미아 섹션에 실린 남성택 교수의 논문은 동시대를 살았던 예술가와 건축가, 마르셀 뒤샹과 르 코르뷔지에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비교한다. 레디-메이드가 아닌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산업이 만들어낸 레디-메이드 오브제들이 처음 등장했던 20세기 초에 이 두 거장이 했던 생각들을 분석해 보는 글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뒤샹과 코르뷔지에는 모두 레디-메이드 오브제의 기능과 아름다움, 그리고 이들을 관객과 사용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으나, 각각의 결론은 달랐다. 뒤샹은 있던 기능도 해체한다. 그의 ‘레디메이드’ 개념에 따르면 레디-메이드 제품을 선택하고 기능을 제품으로부터 분리하는 예술가의 행위 자체가 창작이고 예술이다. 따라서 레디메이드 오브제는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 관객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한들 그것은 뒤샹의 관심 밖이다. 반면 르 코르뷔지에의 ‘유형-오브제’는 일상적 수준에서 다분히 기능적이다. 

남성택은 이 차이가 예술과 건축이라는 장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건축은 예술과는 다르게 반드시 기능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코르뷔지에의 변기는 뒤샹의 변기와는 다르게 합리성과 명료한 의도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르뷔지에는 ‘오브제는 기능을 갖추고 조형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 뒤샹만큼 무관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6월호 프레임에서 다루는 김효영 건축가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인 ‘요소’의 성격은, 같은 건축가임에도 코르뷔지에의 ‘유형-오브제’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김효영은 그의 작업에서 아파트 평면의 기능성을 해체하고, 눈에 띄게 이형적으로 드러나는 건축적 요소 하나하나가 제 기능을 하도록 한다. 임동우 교수의 비평에 따르면 문경 복터진집의 독특한 형태는 주택의 일부 기능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능을 담기 위한 형태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인지적, 기호학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형태이다. 기능의 위상을 일단 확보하고 난 후, 미적 위상을 찾는 코르뷔지에의 오브제에 대한 태도와는 주안점과 순서가 다름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김효영의 요소들은 오브제적 성격을 일부 가졌다 하더라도, 건축이기 때문에 기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형태라는 결과물로 만들어낼 때 기능성이 일순위로 고려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그저 요소들의 대비, 불일치, 어색함, 이형, 그리고 다름이 건축을 인식하는 ‘관객’들이 건축과 관계맺는 방법이길 바란다. 마치 뒤샹처럼, 오브제 자체보다는 그 오브제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더 관심이 있다.

에세이 ‘건축의 용기’에서 그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지나친 호응을 통해 건축이라는 사물과 사람이 관계하는 것을 돕고자 한다. 건축을 지을 때 건축가가 고려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맥락과 기능에 기본적으로 호응하되, 그들을 강조하고 대비함으로써 과장한다. 이것이 건축이 사람과 관계 맺으려는 적극적 의지라고 그는 믿는다.

 

레디-메이드가 처음 등장하던 변화의 시대에 뒤샹과 코르뷔지에가 있었다. 그들의 ‘레디메이드’와 일부는 맥을 같이 하고, 또 일부는 반(反)하는 김효영만의 양식이 등장했다는 것은 ‘레디메이드 그이후’의 변화의 시대가 왔음을 보여준다. 좋은 디자인의 절대적 기준은 없지만, 지나고 보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은 있다. ‘이게 말이 되는 디자인이야?’라는 의문이 들게 하는 디자인은 그 전에는 말이 안 된다는 점에서 다음 시대를 열 가능성이 높다. 코르뷔지에가 건축의 정석이라고 배운 나에게, 김효영의 톡톡 튀는 작업들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 

 

 



 

발산의 시대

이승아​(서울대학교 서양화과/건축학과) 

 

동시대 건축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과하게 발산적이며, 천편일률의 유행이 있는 것 같다가도 매우 빨리 변하고 사라져 과거의 것이 된다. 도심 속 건물의 몇 가지 특성을 보면 ‘누가’ 설계하였을지보다는 ‘언제’ 설계되었을지 가늠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에도 건물에서 설계자가 드러나는 방식 중 하나로 상징적인 요소들이 삽입되기도 한다.

 

​「SPACE(공간)」 ​6월호에서 접한 김효영 건축가의 건물들은 공통되는 형태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설계자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는 몇 개의 공통요소가 아닌 건물의 태도로써 드러난다. 임동우 교수가 비평에서 초현실주의 회화를 언급한 것도 이러한 태도 때문이라 생각한다. 회화와 건축의 공통점 중 하나는 오감 중 시각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팔라스마가 이야기하는 건축, 몸의 감각은 회화에도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디지털 화면에서든 종이에서든) 사진으로 감각하는 데 매우 익숙해진 현재, 회화와 건축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설득하는 방식은 시각일 것이다. 김효영 건축가의 작품들은 시각적으로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듯하다. 비록 그것이 기능에 충실하기만 한 형태가 아닐지라도,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의문을 가지게 하고 생각지 않아본 부분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객체로써 건물을 당연하게 사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지각하며 생각해보게 한다. 이는 건물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태도를 가지고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비평에서는 건물들이 요소별로 해체주의적이라고 언급하였는데, 건물들을 바라볼 때는 전체의 태도로써 느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면서 흥미로웠다.

 

앞서 말한 동시대가 발산적이라는 점이 이어지는 ‘드로잉 매터’ 활동의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쉽게 바뀌는 상황 속에서 아카이빙의 중요성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특히 건축에서 아카이빙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앞서도 회화와 비교하였듯) 회화는 특정 작가 혹은 시대의 작품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은 전시를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건축은 땅과 관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기준으로든 작품들을 모아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둘째, 설계자와 사용자가 다르므로 건물은 쉽게 수정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설계자가 의도한 것과 다른 형태나 기능이 생기거나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계 의도와 과정을 담고 있는 드로잉과 도면들을 아카이빙하는 것은 건축가들의 창작가적인 면을 강조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의 태도와 건축의 역할

이석주(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몇 해 전 학교에서 김효영의 설계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다. 김효영 스튜디오의 수업 방식은 그의 작업만큼이나 남달랐다. 건물의 자화상을 그려오라는 과제도 당황스러웠지만, 가장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이트의 조건에 감정이입 하여 작업물의 성격을 끌어내는 일이었다. 주어진 대지에서 특별히 이입할 만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또 대지로부터 어떤 감정을 포착해낸다 한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과 공감을 한단 말인가. 건축이 응당 갖추어야 하는 보편적 질서에 관심을 갖고 프로젝트에 구현해 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나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과제였다. 간신히 어떤 성격을 찾아내어 내러티브를 구성해 가더라도 더욱 심화된 감정을 끌어낼 것을 요구 받았고, 찾아낸 성격을 건축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교수자와 이견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결국 적당히 절충하는 것으로 학기를 마무리했다. 나름대로는 만족스러운 성취를 거두었으나 교수자의 의도와 수업 목표를 완벽하게 학습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SPACE(공간)」 6월호를 읽으며 긍정과 감정 이입에 대한 김효영의 생각들을 비로소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에세이에서 그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긍정을 통한 관계 맺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문제의식 없는 수용이 아닌 ‘비판의 시선과 함께 긍정의 태도를 의지적으로 유지하려는 것’이며, 건축에 관계의 바탕이 되는 성격을 만들어내는 시발점이다. 한편 그는 점촌 기와 올린 집이나 문경 복터진집 등 그의 작업들에서 종종 보이곤 하는 과장된 조형에 대해서도 그 까닭을 밝힌다. 이들은 단순한 포스트모던적 콜라주가 아니며, 주어진 상황에 대한 ‘강한 긍정’인 동시에 ‘자율적 의지와 주체성’의 표현이다. 6월호를 통해 수업 시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김효영 건축에서 좀 더 관건이 되는 사안들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개인적인 시선을 통한 단호한 긍정과 그로 인한 관계 형성을 강조하는 김효영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의 계획안들에서 나타나는 개성적인 형태들과 과도한 제스처, 즉 ‘지나친 호응’에 대해 의아한 생각 역시 여전하다. 내게 김효영의 작업들이 갖는 의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규방’ 안에 갇혀 있는 건축가가 가질 수 있는 입장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의 에세이에서 언급되었듯 건축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그와 동시에 비판적인 시선 또한 거두지 않는 것이다. 체념 대신 ‘부정의 부정’을 통해 얻은 긍정의 태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축가가 사회에 대응하는 한 가지 가능성이며, 거대 자본의 도구 외에는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건축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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