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동 회나무길 끝자락에 책이 켜켜이 쌓인 듯한 외관을 가진 ‘그래픽’이 들어섰다. 외장재는 중국의 도예작가 문평과 협업했고, 콘셉트는 술 마시는 만화방이다. 재료의 사용, 술을 마시고 그래픽 노블을 읽는 행위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조도 계획 등에서는 김종유(오온 대표)의 발자취가 엿보인다. 김종유는 약 15년간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인 유랩을 운영하다 2021년 설계사무소인 오온을 개소했다. 그래픽은 오온의 첫 프로젝트다. 그를 만나 그래픽을 맡게 된 배경부터 인테리어와 건축을 넘나드는 이야기까지 나눠보았다.
인터뷰 김종유 오온 대표 × 박지윤 기자
박지윤(박): 그래픽은 오온의 이름으로 처음 선보이는 건축물이다. 프로젝트를 맡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김종유(김): 단골로 가던 위스키바 사장님이 늦은 밤 전화를 했다. 손님 중 한 명이 건물을 지을 예정인데 취향이 나와 비슷해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비몽사몽 전화를 받아 날이 밝으면 연락하겠다고 해놓고 깜빡 잊어버렸다. (웃음)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위스키바 사장님이 다시 연락을 해왔다. 왜 연락을 안 했냐며, 이미 도시형 생활주택을 설계했다고 하더라. 죄송한 마음에 설계에 문제가 없는지 검토를 해주기로 하고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와 술 취향을 비롯한 모든 취향이 비슷했다. 남자 둘이 1시간으로 잡은 회의를 4, 5시간까지 이어갔다. (웃음)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나 클라이언트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설계를 해놓았던 도시형 생활주택의 설계비는 그대로 지불하여 마무리를 하고, 다시 우리에게 그래픽 노블을 위한 건축을 의뢰하겠다고 했다.
박: 콘셉트는 술 마시는 만화방이다. 기획 의도와 타깃층이 어떻게 되나?
김: 그래픽 노블의 마니아가 우리의 타깃층이었다. 기획할 때에는 회원제를 목표로 했지만 개점 초기에는 일반인에게도 오픈 하기로 했다. 가오픈을 했을 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일단 그래픽 노블과 건물 그래픽을 알리고 점차적으로 마니아층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박: 건물은 장진우 거리에 위치한다. 조용해진 거리에 상업 공간을 만든 것인데, 이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
김: 장진우 거리에는 장진우의 가게가 없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많은 가게들이 떠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는 오히려 마니아층이 찾아와 조용히 책을 보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도 클라이언트 의견에 동의한다. 뜨겁게 불타고 식어버린 동네에 다른 프로그램의 건물이 들어와 조용히 숨어 마니아를 만족시키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박: 창이 없고 하얀 세라믹 소재로 구성한 외관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이런 외관을 가지게 되었나? 김: 나는 파인아트를 좋아하고 동경했다. 그 부분이 작업 초기에는 오브제의 사용으로 드러났는데, 이번 작업에서는 재료로 표현된 셈이다. 그래픽은 책을 다루는 공간이라 종이와 연관한 형태를 구현하고 싶었다. 구상을 하고 있을 즈음, 한 갤러리에서 도예 작가 문평의 작업을 보게 되었다. 세라믹을 책의 형태로 본뜬 작업을 보고, 함께하자고 연락을 했다. 창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주변 환경 때문이었다. 넓고 시원한 조망이 없었고, 창을 내어도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은 옆 빌라의 벽돌뿐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창을 없애고, 책에 집중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박: 내부는 책을 읽어야 하는 공간인 동시에 술 마시기에도 적합해야 한다. 이와 관련한 조도 계획이 궁금하다.
김: 이 부분은 유랩에서 꾸준히 인테리어 디자인을 해와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유랩은 식음 공간 디자인 덕분에 성장한 사무소다. 축적된 식음 공간에 대한 베이스가 방대하고, 그 데이터 중 하나가 조명 계획이다. 유랩에서 담당한 레스토랑의 경우, 시간대별로 조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3, 4단계로 구분해 설계하기도 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창이 없기에 조도 조절을 더욱 섬세하게 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사용자가 머무르는 공간에서는 필요에 따라 광원의 위치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고, 안쪽에 위치한 누워서 책을 읽는 공간에는 개별적인 조명을 두었다. 전체 조도는 벽 틈과 천창에서 내려오는 빛이 섞이도록 만들어 자연스러운 채광을 연출한 것이 특징이다.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조명 회사 비아비주노와 검토해 조명 계획을 완성했다.
박: 설계는 책 읽는 다양한 자세에서 기인했다 들었다. 구체적으로 건축 요소와 가구에 어떻게 적용했는지 알려 달라.
김: 우리는 도시의 콘텍스트를 읽지 않았다. 일반적인 건축설계 방식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책에만 집중했다. 건축의 외관은 담담하게 존재하되, 내부 공간은 책을 읽는 사람을 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책을 보는 자세부터 연구했다. 이 때문에 디자인은 내부 공간부터 시작하고, 외부 형태를 맨 마지막에 마무리하는 방향이 되었다. 선호하는 책 읽는 자세는 모두 다르다. 우리는 눕고, 쪼그려 앉는 등의 자세를 아홉 가지 유형별로 정리했고, 가구 높이를 분석해 공간에 녹였다. 대표적으로 1층에는 사이잘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계단에 앉을 수 있도록 했다. 2층에 올라서면 먼저 보이는 공간에는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고, 동선을 돌아가야 하는 구석 공간에는 소파의 깊이를 조절해 반쯤 눕거나 완전히 누워서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3층에는 바 테이블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행태가 형태가 되기를 원했다.
박: 그래픽 노블 약 5000권이 자리한 공간이다. 그래픽 노블은 판형이 다양하고 표지가 중요한 책도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계에 녹여냈나?
김: 다양한 종류의 책을 하나하나 맞추기란 무리고, 시즌별로 입고되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책을 디스플레이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책 크기의 평균치를 설정하고 벽을 따라 선반을 배치했다. 아트북과 같은 대형 크기의 책은 테이블에 펼쳐놓는 방향으로 설계했다. 이는 전시와 비슷한 형태다. 서점처럼 딱딱한 모습이 아닌, 그렇다고 술집처럼 너무 자유분방한 모습은 아닌, 서점도 술집도 아닌 제3의 유희 공간이 되도록 고려했다.
박: 그래픽의 외장재는 때가 탈수록 아름답다고 했다.
김: 프로젝트는 팬데믹 이전에 시작되었다. 건물 외장재를 중국 포산의 세라믹 공장에 발주하고 샘플을 몇 장 얻어와 사무실 외부 테라스에 두었다. 이후 팬데믹이 시작되어 작업이 지연되었고, 1년 2개월 후 외장재를 다시 보니 때가 타 있었다. 먼지로 인해 흰색이 조금 더 부드러운 아이보리의 색감을 얻게 되었고, 그 색 또한 아름다웠다. 이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흉해지는 건물이 아닌,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적층하는 건축을 하는 것이 우리의 지향점이다. 유랩에서 진행했던 ‘도시의 부산물’(2020)과 그랑핸드 마포(2020)의 작업도 이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도시의 부산물’은 도시에서 버려진 소재들을 재활용하여 새로운 소재로 만드는 시리즈였다. 공사장에서 버려진 금속 각파이프를 발견했고 녹슬고 찌그러진 모습이 오히려 애틋해 시리즈 코너(2020)에 사용하게 되었다. 그랑핸드 마포에서는 시간이 흐르며 빛으로 인해 질감이 변하는 것을 관찰했고, 이번 프로젝트 외관에 비슷한 개념을 적용하게 되었다.
박: 앞으로 건축사사무소 오온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알려 달라.
김: 2007년 유랩을 오픈했을 당시, 랩이라는 이름은 랩 시리즈라는 화장품 브랜드 빼고는 전무했다. (웃음) 클라이언트의 공간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완성도가 높아지는, 약 10년 정도가 지나면 실험을 그만두고 회사 명칭을 변경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실험을 하고 있고 실패도 거듭하고 있다. 그래서 사명을 변경하기보다는 새로운 이름으로 건축사무소를 만들고 유랩과 성격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오온의 서브 타이틀은 메타웍스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3D 프로그램들은 사실 메타버스에서 사용하는 툴과 거의 비슷하고 때론 혼용도 한다. 우리가 설계한 공간들의 파일을 메타버스에 업로드 해 가상의 서점을 만들어 판매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클럽 공간을 만들어 가상의 공연을 펼칠 수도 있다. 우리의 공간을 메타버스에 접목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고 먼 이야기는 아니다. 오온의 메타웍스는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한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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