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닮은 캐릭터가, 평소의 나라면 쉽게 시도하지 못했을 과감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가고 뮤직비디오 촬영장을 누빈다. 다른 이용자를 만나기도 하고, 함께 포즈를 취하며 인증샷을 찍고, 퀘스트를 수행하기도 한다. 제페토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2018년 8월 출시된 제페토는 증강현실(AR) 아바타를 기반으로 하는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이다. 카메라 어플리케이션인 스노우에서 파생된 서비스로, 이용자의 얼굴을 딥러닝으로 인식해 캐릭터로 바꿔주는 기능에서 출발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피부, 머리색, 체형까지 수천 가지 부위를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 완성된 아바타는 가상공간 ‘월드’에서 활동한다. 고등학교 교실, 2호선 지하철역, 한강 공원 등 일상적인 공간부터 패션쇼 런웨이, 유령의 집, 벚꽃 카페 등 테마가 뚜렷한 공간까지 다양하다. 월드마다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데 예를 들어 한강 공원에 가면 반포대교의 무지개 분수를 감상하고,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남산 타워를 사진기에 담고, 편의점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수상 택시를 탈 수 있다. 누군가는 가상공간에서의 경험이 무슨 의미를 가지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 서비스의 주 이용자인 Z세대는 가상 세계에서의 경험을 현실의 것과 같은 위계로 바라보고 있다. 2021년 3월 기준, 누적 가입자가 2억 명에 다다르니 새로운 경험에 대한 수요를 짐작해볼 수 있다.
특성과 취향을 반영해 아바타를 만들고 가상공간 속에서 활동하게 하는 일련의 일들은 우리가 이전에도 경험해본 적이 있다. 2000년대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SNS인 싸이월드에서 우리는 선불충전식 전자화폐 ‘도토리’를 유료 결제해 아바타에게 옷을 사 입히고 한 칸짜리 방을 꾸몄다. 다만 제작자가 제공하는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만 가능했고,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소비자가 값을 치러야 했다. 반면에 제페토는 ‘스튜디오’ 서비스를 이용해 이용자가 직접 아바타의 옷, 신발, 헤어스타일 등을 디자인할 수 있다. 심지어 판매도 가능하다. 수익 구조가 생기며 제페토에는 자체적인 경제 생태계가 구축됐다. 제페토에서만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도 등장했다. 제페토 크리에이터 1세대로 불리는 렌지는 10개월 동안 아이템 100만 개를 만들며 자신이 론칭한 패션 브랜드를 견고하게 구축했다. 제페토의 공간인 월드 또한 ‘빌드잇’ 서비스를 이용해 이용자가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다. 이 기능은 개인 이용자는 물론이고 패션, 유통, 엔터테인먼트 등 여러 분야가 주목하고 있다. 물리적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균질한 경험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발 빠른 구찌가 이미 이곳에서 쇼를 선보였고, 편의점 CU가 매장을 오픈했으며, 걸그룹 블랙핑크가 사인회를 열었다. 스튜디오와 달리 빌드잇은 아직까지는 수익 구조가 없어 홍보용으로 이용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원하는 공간을 맞춤으로 디자인해주는 외주 서비스는 지금도 활발하다. 조만간 제페토에서만 활동하는 건축가도 나타나지 않을까? (글 최은화 기자)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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