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5일 해안건축이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윤세한 대표이사는 “지난 30년을 되짚어보면, 실패가 먼저 떠오른다. 실패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한 단계 한 단계 이겨나가며 성장해야 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본지는 30주년을 맞아 해안건축 내부에서 진행된 좌담에서 건축계와 공유할 만한 지점을 리포트한다.
좌담 김태만(사회) × 박재우 × 안성호 × 윤세한 × 주상선 (해안건축)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설계공모(2011) 참여작
관성과 탄성, 유형을 재정의하다
김태만(김): 해안이 설계한 공공 부문의 청사나 오피스 빌딩을 되돌아볼 때, 우리가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여기는 유형을 지금 시대에 맞게 다시 질문해보는 과정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준공 작업뿐만 아니라 공모전에 출품한 참여작도 포함해 이야기해보자.
안성호(안): 종합직업체험관(2007)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다. 설계공모에 임할 때 각 직업이 펼쳐지는 가상도시처럼 전시 공간을 만들면 방문자들이 실제로 직업을 체험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시관을 작은 도시로 만들고, 건물 내 다양한 보이드 공간을 포함하였다. 보이드 공간은 마당이나 광장 같은 기능인데, 아이들이 주로 체험한다는 특성을 반영해 쾌적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전시 공간=블랙박스’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이 보이드가 충분히 쓰임새가 있을지, 이러한 새로운 유형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게 되었다.
윤세한(윤): 우리가 제안한 안은 다양한 행태와 변화를 담을 수 있는 진화 가능한 유형이라고 본다. 건축물의 수명은 50년, 100년 갈 수 있지만, 그 내부의 콘텐츠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따라서 그 변화를 담아내는 가능성을 가진 건물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안: 청주시청사(2020)는 굉장히 긴 회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 자유로운 건물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윤: 청주시청사의 회랑은, 사용자인 시민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다양한 용도로 변주가 가능하다. 유럽 도시의 시청 앞 광장을 떠올려보자. 공공 공간으로서 광장이 건물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시청사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회랑 공간이 현대적 광장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했다.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모두 어우러졌을 때 공공 공간의 역할을 하게 된다. 도시의 광장은 평상시에도 다양한 쓰임이 있을 것이다.
김: 세종시의 중심행정타운 마스터플랜(2007)과 정부세종 신청사(2018) 등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주상선(주): 공공 건축의 경우, 사용자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공간이나 시설을 건축가가 제안해주지 못하면, 기존의 사용자들은 은퇴할 때까지 똑같은 건물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 좋은 평, 나쁜 평이 있겠지만, 사용자들이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공간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김: 중심행정타운 마스터플랜의 지향점들 중 살아남은 것은 플랫시티 정도로, 물리적인 수평성, 청사 건물의 연결 정도가 구현되었다. 청사의 폐쇄적인 이용(펜스, 옥상정원의 부분 개방 등)으로 그나마도 가치가 퇴색되었고, 유지되었던 수평성 역시, 이질적인 높이의 신청사 안을 선정하면서 무색해졌다. 애초의 의도가 다양한 변수에 의해 변형되면서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뼈대만 남은 이 도시에 아쉬움이 남는다.
안: 역사도심 활성화를 위한 세운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2017)도 낙선했지만 의미 있는 프로젝트다. 세운상가를 마스터플랜의 일부로 포함하는 전략을 설정하여, 남쪽의 밀도를 낮추고 정원처럼 만들고자 했다. 이 디자인 전략은 대상지의 중요한 맥락을 포괄했다는 호평과 함께, 극단적인 밀도 배분에 아쉬움이 있다는 상반된 평가를 듣게 되었다.
정부세종 신청사 국제설계공모(2018) 참여작
(역사도심 활성화를 위한) 세운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국제지명초청설계공모(2017) 참여작
종합직업체험관 건축 현상설계공모(2007) 참여작
참조와 전환, 새로운 원형을 만들다
김: 아파트로 대변되는 주거와 백화점, 쇼핑몰 등으로 대변되는 상업 유형은 외국의 것을 참조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경제력, 소비 습관, 라이프스타일에 의해 만들어지는 유형일 수밖에 없다. 특히 주거와 상업 건축은 해안건축의 30년이 오롯이 녹아있는 대표적인 카테고리다. 이 부분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노력은 무엇일까?
주: 일산 라페스타(2001/2003)는 아이파크몰 다음에 진행한 상업 프로젝트였다. 해외에서는 대개 하나의 큰 대지에 넓은 주차장을 확보하고 건물을 자유롭게 배치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섯 개 블록을 이어서 하나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지구단위계획으로 정해진 공공 보행자 통로와 같이 설계자가 손댈 수 없는 부분으로 인해 전체 시설을 활성화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해 우리 의도대로 구현되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 웨스턴 돔(2003/2007)은 그런 단점이 없는 필지를 골랐다고 생각한다. 웨스턴 돔은 두 개 블록이 하나의 필지로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상업적 이익만 생각했다면 800%대 용적률의 고밀도 오피스텔이 결합된 복합상업시설로 건축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건축주가 도시적으로 적정한 밀도를 선택했다. 신도시 내 상업시설로서 필요한 장소성과 커뮤니티 공간, 도시적인 공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계획적으로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상부 오피스의 규모를 적정 규모로 줄이면서 주변 블록과의 연계성을 고려하고 신도시로 진입하는 초입에 인상적인 건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
김: 이런 상업시설은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과 같은 장소다. 도시의 일부이면서 중심지에 있기도 하니, 그 동네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삶의 기억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리테일 프로젝트는 도시 공간의 중요한 (문화) 인프라라는 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박재우(박): 새뜸마을 7단지 투머로우시티(2013/2017)는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지만, 기존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 않다는 상식(?)을 가지고 접근했다. 그런데 사용자들에게 조사를 해보니 의외로 아파트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많이 느끼더라. 단점으로 꼽히는 주요 내용은 ‘동일한 평면이 적층된 성냥갑 같은 매스가 획일적이다’였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하지 말고 딱 한 가지만 해결해보자 싶었다. 그래서 획일성을 탈피하기 위해, 저층에서 초고층, 단독주택형과 평지지만 테라스하우스 등 주동의 유형을 다양화하고, 스케일에도 변화를 주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대한민국 공공주택 설계공모 대전(2018)에도 공공임대주택단지 계획을 제한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최저소득층이나 고령자가 많이 사는 단지들을 여럿 답사했는데, 그 주거환경에 크게 놀랐다. 집이 정말 좁고 짐이 너무 많은 환경인데도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주민들이 집 밖에서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단지 남쪽의 저층형 주동군은 6개의 주동이 공중브리지를 통해 중앙 코어를 공유하는 독창적인 형태로, 공용 공간에 텃밭과 휴게 공간을 만들었다. 주민들이 집으로 가는 동선을 일부러 길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자주 부딪치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안: 주거의 경우는, 공공 프로젝트를 비롯해 반성적 대안을 만들기 위한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반면 상업시설의 경우는 대형 유통사가 개발, 운영하는 상업시설만이 살아남는 시장 상황이라 새로운 상업 공간에 대해 어떤 도전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윤: 인터넷 쇼핑몰이 발달하면서, 오프라인에서 하는 행위가 감소하며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인간성에 반하는 언택트가 일상화될 때, 건축가의 역할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의 본성인 모여서 즐기고 느끼는 행위가 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 사람을 만나서 느끼는 체취 등, 감성이 사라질 수 없다. 시대를 앞서가는 어떤 유형을 만들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 아니겠나.
새뜸마을 7단지 투머로우시티(2013/2017) ⓒ이남선
웨스턴 돔(2003/2007) ⓒ박완순
기술과 경험, 완벽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다
김: 기술적인 집적이나 경험이 필요한 설계 유형에서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노하우를 쌓아가고 발전해나갈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박: 미래건축 특별설계공모 준비를 얼마 전에 진행하면서, 기술이 특수시설에만 한정적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결론은 스마트 시티화이다. 단순히 골조를 세우는 데 기술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설비와 구조에 스마트 기술적인 요소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스마트 기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편리한 삶을 위한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제로에너지 건물과 관련된 기술이다. 이제는 건축도 특수 분야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기술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가 된 듯하다.
김: 2012년 즈음부터는 공항 공부를 많이 했다.
주: 울릉공항 랜드사이드(2019)에 당선되었을 때 감회가 새로웠다. 물류, 교통, 상업, 업무 등 일반적인 시설의 결정체가 공항이기에 더욱 그랬다. 공항설계에 도전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초기에는 AIA에서 발간한 『아키텍처 그래픽 스탠다드』를 펼쳐놓고 고민해야 했다. 해외사들이 노하우라며 자세한 기술은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현상설계에 참여할 당시 KPF와 공항 전문 플래너인 APDi와 공동으로 설계했는데, 디자인적인 완성도에 비해 기술적으로 큰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 진입장벽을 넘기 위해서 기술력이 꼭 필요한 유형이 병원, 공항, 데이터센터 등이다. 그 유형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사항들을 이해하고 플래닝하는 데 기술력이 필요하다. 또 하나, 기술집약적인 건물 자체, 디자인 엔지니어링이 중요한 건물을 구현하는 데도 기술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인천국제공항, 국립항공박물관 등의 설계공모에 참여하며 기술적인 전문성을 쌓아가는 과정이 의미 있을 수밖에 없다. 엔지니어링이 득세하는 건물일수록 기회가 있다. 건물의 공간구성 자체가 구조이고 스킨이 되므로 기계장치처럼 디자인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많은 공공 인프라 프로젝트에서, 발주처의 선호로 비정형 매스가 선택되지만, 정작 실현을 위해서 필요한 재정 자원을 동원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비정형처럼 보이는 건물을 잘 뜯어보면 어색한 경우가 많다. 차라리 2D로 구현할 수 있도록 고려하는 게 낫다. 비교적 성공적인 사례가 국립항공박물관이다. 유형적 전문성을 가진 분야에서 어느 정도까지 전문성을 쌓을 것인가에는 여러 해법이 있을 수 있다. APDi만큼의 전문성은 아니라도, 그 유형에 대한 이해가 일정 수준 이상 쌓여있느냐 마느냐는 중요하다. 데이터센터, 병원, 공항 등의 유형에 전문가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제너럴리스트로서 노하우를 충분히 축적해야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
김: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다. 해안건축은 건축이 메인이긴 하지만 도시와 건축, 조경을 통합적으로 디자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단순히 디자인 어휘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정이나 방법적으로도 여러 시도를 했는데, 그러한 시도들이 성공적이었다고 보는가?
박: 우리 (주거) 본부의 경우는 공동주택 설계를 한마디로 공간 만들기라고 정의한다. 최근에는 여기에 건축계획을 더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개별적인 블록을 만들기보다 도시의 한 조각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도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김: 한국전력공사 신사옥(2009)이나 세종시의 작업들에서 조경이 많이 보인다. 조경과 건축이 각자 땅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건축 어휘를 다루는 방식에 괴리가 크다고 생각하는데, 그 간극을 줄이거나 표현의 가능성을 넓히는 데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비슷한 예가 얼마 전 진행한 고양 창릉 3기 신도시이다. 이 프로젝트는 조경의 눈으로 땅을 읽으면서 선을 만들어낸 것이다. 건축과 조경의 디자인 요소 결합이 목표가 아니라 둘 사이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다. 땅에 그린과 블루를 먼저 짜고, 그 사이 포켓들에 건물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서, 남는 땅에 건물을 그리는 방식으로, 도시를 설계하는 기준과 건물을 설계하는 기준, 그리고 조경설계의 기준이 섞이게 되었다. 건축가들이 이해 범위를 넓히고 화학적으로 확장한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였다.
울릉공항 랜드사이드 건설공사 설계공모(2019) 당선작
한국전력공사 신사옥 건립 설계경기(2009) 참여작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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