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핀란드에 갔을 때, 택시 기사와 알바 알토에 대한 이야기를 40분 동안 나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러웠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안성주와 유인영이 바라는 장면이다. 출판 스튜디오 ‘에로시스’를 운영하는 그들은 예술 및 디자인 분야에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길 바란다. 2019년부터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의 미출간 원고를 번역한 출판물 『매뉴스크립트』시리즈를 발행 중이고, 이어서 2020년부터는 온라인 구독 서비스 ‘제너럴리스트’를 선보이고 있다. 넓은 범위를 두루 짚으면서 때로는 한없이 깊게 파고들며 조금씩 점이지대를 넓혀나가고 있는 에로시스를 만났다.
인터뷰 안성주, 유인영 에로시스 공동대표 × 최은화 기자
최은화(최): 출판 스튜디오 에로시스를 운영하는 두 사람의 배경이 궁금하다. 어떻게 같이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됐나?
안성주(안): 미국 코넬 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건축 실무도 하다가 샛길로 빠졌다. (웃음) 큐레이션에 관심이 생겨 대학 4~5학년 때 관련 수업을 들었고 이후 뉴욕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조수로 일했다.
유인영(유): 나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지냈다. 미국 시카고 예술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고, 미술관 인턴을 거쳐 광고회사에서 일했다. 이후에 한국에 와서 다양한 영역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중 옆 동네에 사는 고등학교 후배 안성주를 알게 됐다. 둘 다 뭔가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다는 공통된 갈증이 있었다. 그러다가 안성주가 “아돌프 로스가 패션을 주제로 쓴 글이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는데 같이 해볼래?” 해서 시작하게 됐다.
최: 기획, 리서치, 아카이빙, 번역, 편집, 디자인, 제작, 발행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에 직접 다 뛰어들고 있다. 왜 이렇게 스스로를 갈아 넣고 있는가? (웃음)
유: 호기심으로 글감을 발견했는데, 번역이 안 되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틈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여러 군데에서 모은 글들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면서 잘 읽히도록 번역하고, 일관된 메시지와 흐름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편집 방식도 고민해야 했고, 이는 디자인과 발행으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철저히 필요에 의해 내려진 결정이다.
안: 전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또렷하게, 프로젝트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을 수 있었다.
ⓒ손미현
최: 예술과 디자인을 다루는 기존 콘텐츠와는 어떤 차별점을 가지는가?
유: 전문 분야에 관한 콘텐츠는 명확하게 타깃층을 설정한다.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위한 콘텐츠가 따로 존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건 이들을 연결해주는 접점을 만드는 것이다. 스튜디오 이름인 ‘에로시스’는 ‘허물다’라는 뜻의 라틴어 ‘에로데레(erodere)’에서 나온 것으로, 경계를 허물고 점이지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담고 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경계도 허물지만, 분야와 분야 간의 경계도 허물고자 한다.
최: 인물에 주목하는 것이 그러한 경계를 허무는 방식 중 하나일까?
안: 우선 친근감부터 형성하고 싶었다. 아무리 지루하거나 어려운 주제라 해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재미있게 들릴 때가 있지 않은가. 글 위에 특정한 인물이 또렷하게 덧입혀진다면 독자들이 새로운 분야나 주제에 보다 쉽게 이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찾는다. 이러한 각자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고유한 렌즈를 빌려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방법을 나누고 싶었다.
최: 첫 번째 프로젝트인 『매뉴스크립트』는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의 미출간 원고를 발굴해 엮은 출판물이다. 이제까지 아돌프 로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파올라 안토넬리를 매 호의 주인공으로 다뤘는데, 인물의 선정, 콘텐츠의 발굴은 어떻게 하는가?
안: 우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아돌프 로스의 시작이 그렇다. 시애틀에서 서점을 갔는데 주인이 아돌프 로스가 생전에 패션과 관련된 여러 칼럼과 에세이를 집필했다고 알려줬다. 그 텍스트들이 희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호기심에 리서치를 시작하게 됐다. 이렇듯 별것 아닌 것들로부터 실마리들을 찾고 연결해간다. 흩어진 빵 부스러기를 찾아가는 것처럼. 그런 과정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다음 호인 『매뉴스크립트 02: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아돌프 로스를 리서치하다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동시대에 오스트리아 빈에 살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어 또 새로운 호기심으로 시작됐다. 시작점은 늘 다르지만 항상 대화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하다 못해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을 보거나, 지나가듯 내뱉은 말을 기억해 다시 찾아본다거나, 책의 각주에 나와있는 작은 글씨의 문장을 살펴보기도 한다. 뉴스 기사, 유튜브, 팟캐스트 등의 채널도 파도 타듯이 훑는다. 발굴하는 단계에서 중요한 건 호기심이고, 더 중요한 건 끈질김이라고 생각한다.
최: 심지어 동일한 원고의 초판본, 2쇄본 등에 걸친 버전을 모으기도 했다. 여러 해를 거치며 삭제, 추가, 수정된 부분을 일일이 기록했고 교정부호, 글자색 등을 사용해 지면에 그대로 드러냈다.
안: 텍스트가 유동적인 매체임을 깨달았다. 기록이라는 일종의 완결성을 가진 행위는, 과정을 역으로 하나씩 짚어보면 여러 변화를 거친다. 아돌프 로스도 시대에 따라, 매체에 따라 원고의 일부분을 수정했다. 또 어떤 부분은 계속 남아있기도 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텍스트가 영구적이지 않다는 게 흥미로웠다. 우리는 수많은 버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또 하나의 기록으로 남기는 방식을 택했다. 중간 줄을 긋는 등의 방식으로 변화된 부분을 드러냈다.
최: 저작권은 어떻게 확보하는가?
안: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저자가 사망하고 7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말소된다.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일이라 제작비가 없었다. (웃음) 이런 아주 현실적인 이유로 옛날 텍스트부터 시작하게 됐다.
최: 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다. 인물의 캐릭터를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 어투, 어순, 리듬 등을 세밀하게 다듬는다고 알고 있다. 이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고민들을 거치는가?
안: 출판물 『매뉴스크립트 01: 아돌프 로스』의 첫 문장의 첫 절, “지난 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며”만 하더라도 약 20가지의 버전이 있었다. ‘지난’은 ‘흘러간, 스쳐 지나간, 지나온, 돌아본’으로, ‘천 년의 역사’는 ‘수천 년, 몇천 년, 지난 천년’으로, ‘돌아보며’도 ‘되돌아보다, 돌이켜보다, 통틀어보다, 들춰보다, 회고하다’ 등의 후보가 있었다. 단어와 구마다 가능한 모든 표현을 나열하고 최적의 조합을 찾았다. 단어들의 조합이 어울리도록, 소리내어 발음할 때 파열음이나 경음 등이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운율과 리듬감을 매끄럽게 조합한 번역문이 원문의 길이에 최대한 가깝도록 했다.
유: 아돌프 로스는 꽤나 캐릭터가 명확한 사람이다. 짧은 문장을 사용해 본인의 입장을 명확하고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의문문이 거의 없고 분명하게 자기주장을 펼친다. 일례로 자신이 신문사에 기고한 글에 대해 좋지 못한 피드백을 받고선 그다음 주 기고문에 이를 그대로 가져와서 조목조목 반박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줄곧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글을 쓴 사람이다.
안: 최근에 다루고 있는 알바 알토는 조금 까다롭다. 50여 년에 걸쳐 쓴 에세이, 연설, 강의, 인터뷰가 대상이다. 20대 때에는 아돌프 로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단도직입적이고 패기 있는 글을 썼는데 30~40대를 지나면서는 이러한 태도가 옅어지면서 완곡한 표현이 등장한다. 게다가 때에 따라서 스웨덴어, 독일어, 영어 등 여러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겹의 변수들을 꿰뚫으며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핵심에 가닿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적인 특성도 있다. 알바 알토의 문장은 우아하고 담백하다. 시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의 균형을 추구하는 그의 디자인과 흡사하다. 이러한 캐릭터를 언어로 잘 풀어내고자 많은 노력을 가하고 있다.
최: 『매뉴스크립트』는 판형도 독특하다. 종이 출판물이지만 제본하지 않고 낱장의 종이들을 클립으로 고정해 불투명한 봉투에 넣었다.
유: 유동적인 원고, 미완성된 원고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별도의 제본 없이 클립으로 제철했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원고를 발굴해내는 듯한 경험을 주기 위해 봉투에서 꺼내어 읽도록 했다. 독자 마음대로 페이지의 순서를 바꿀 수도 있고, 포스터처럼 낱장을 벽에 붙여놓을 수도 있다.
최: 『매뉴스크립트』를 확장시켜 최근에는 온라인 구독 서비스 ‘제너럴리스트’를 론칭했다. 요즘에는 각종 메일링 서비스가 참 많이 있지만, 동시대의 일이 아닌 과거의 일을 큐레이션하는 점이 다른 서비스들과 두드러지는 차이점인 것 같다. 콘텐츠의 형식에 변화를 주게 된 계기가 있는가?
안: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매뉴스크립트』에서는 인물 위주의 콘텐츠를 제작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글을 많이 쓰지 않았거나 인터뷰를 뜸하게 진행한 인물인 경우에는 출판 형식에 적합하지 않아 보류되는 경우가 많았다. 뉴스레터는 새로운 창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째는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매뉴스크립트』는 독립출판물로 판매처가 많지 않고, 수작업으로 제작해서 제작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독특한 판형으로 인해 비교적 쉽게 파손되는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콘텐츠의 디지털화를 결심하게 됐다. 항상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출판물에는 담지 못했던 영상, 음성, 링크 등의 콘텐츠도 담을 수 있어서 더 풍성한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제너럴리스트’는 분야 전반에 관한 탐구인 반면, 『매뉴스크립트』는 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형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최: 관심 있게 보는 구독 서비스나 플랫폼이 있는가?
안: 「이-플럭스」라는 플랫폼이 있다. 건축, 교육, 책 등의 분야로 우선 나뉘고, 건축 내에서도 하우징, 소프트웨어, 인프라스트럭처, 환경, 포용성 등의 카테고리로 세분화된다. 「디진」, 「아크데일리」처럼 소식과 트렌드를 빠르게 전달하기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차근차근 전달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유: 나는 유튜브, 왓챠, 스포티파이, ‘일간 이슬아’ 등 많은 서비스를 구독 중이다.
안: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내부적으로 많이 나눈다. 인공지능 기반의 알고리즘이 전제된 서비스들은 목적이 뚜렷하다. 바로 사용자들의 애플리케이션 체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용자가 이전에 소비했던 콘텐츠와 유사한 것들을 계속해서 추천한다. 우리는 그 반대에 있다.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유: 내 취향을 꿰뚫고 있는 서비스를 이용하면 편하긴 하지만, 모든 서비스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새로운 것을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 될 거다.
최: 뉴스레터 서비스 ‘제너럴리스트’는 시즌제로 운영되고, 지난 7월 6일부터 10월 23일까지 3개월간은 건축이 주제다. 일주일에 3~4번 메일이 발송되어 약 50여 개의 콘텐츠가 건축이라는 주제로 묶이게 된다. 건축이라는 다소 거대한 분야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궁금하다.
안: ‘제너럴리스트’의 주요 뼈대는 ‘매뉴스크립트’의 콘텐츠다. 알바 알토의 글, 강연, 연설 등 30여 년에 거친 텍스트를 다룬다. 알바 알토라는 인물에 대해 다방면으로 접근하면서 중요한 키워드들을 추출해내는 게 첫 번째다. 예를 들어서 알토가 조각·회화·건축의 연관성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여기서 ‘건축과 예술’이라는 화두를 끌어냈다. 그리고 이 키워드로 콘텐츠를 확장해 전개하는 식이다. 건축과 설치미술의 접점을 이야기하는 서도호, 대지예술과 기념비적 작업을 하는 마야 린의 텍스트가 다음 순서 메일로 발송됐다. 이렇게 큰 줄기로 ‘매뉴스크립트’가 있고, 곁가지들로 ‘대화의 기록’, ‘큰 그림’, ‘목록들’, ‘시선과 사유’, ‘책풀이’ 등이 유동적으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뉴스레터의 특성상 연결되는 부분을 만들고자 했지만, 부분만 떼어내어 읽어도 무방하다. 마치 잘 큐레이팅된 전시를 볼 때, 주어진 순서대로 봐도 좋지만 동선에 상관없이 마음대로 봐도 다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최: 시간과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콘텐츠를 발굴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에로시스가 발견하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안: 지식을 얻는 창구가 다각화된 만큼 유럽 어딘가에 묻혀있던 텍스트를 다룰 수도, 5분 전에 종료된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다룰 수도 있다. 다만 좋은 텍스트에 담긴 유의미한 메시지는 시공간을 초월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과거의 텍스트들은 종종 오늘날 급변하는 트렌드와 맞닿으며 지속적인 연관성을 만들어낸다. 아돌프 로스가 쓴 여성 패션에 관한 글은 오늘날의 페미니즘 이슈와 맞닿으며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만들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클래식한 텍스트들은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20세기 초반은 급격한 도시 팽창과 기술 발전, 전쟁 때문에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알아내고 또 지켜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고 이 당시에 쓰인 텍스트들에는 이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예술가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에로시스가 제안하는 콘텐츠를 통해 독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며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최: 뉴스레터 서비스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에로시스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 달라.
유: e북, 영상, 소셜미디어 등 매체에 따른 콘텐츠 수명을 분석한 자료를 본 적이 있다. 트위터는 18분, 페이스북은 5시간, 인스타그램은 21시간 만에 콘텐츠가 휘발되지만, 뉴스레터는 몇 달 동안 지속된다더라. 우리는 우리의 콘텐츠를 사람들이 여유 있는 호흡으로 받아보길 원했기에 뉴스레터를 선택하게 됐다. 뉴스레터의 장점은 다분히 개인적 경험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과 달리 댓글창이 없기 때문에 혼자만의 사색에 충분히 빠질 수 있다.
안: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나가는 식으로 진행해왔다.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그냥 부딪쳐보는 편이다. 지금 준비 중인 게 꽤 많다. 『매뉴스크립트』의 작고 가벼운 버전인 ‘미니스크립트’, 묻혀있던 예술가들의 드로잉 모음집 등 여러 작업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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